두 번째 회귀 5- 고심하는 빌런 2

by 꿈꾸는 노마드

“응?”


약간의 놀라움으로 기남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과 함께 박지우를 향해 물었다.


“너 몸은 괜찮아? 지난번 그때...?”

“네! 괜, 찮습....니다!”

“우리 지우가 천사가 나타나 자길 구해줬다더니 그게 바로 너였어? 우리 인연 정말 질기다!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그날 오연주는 자신과 지우 관계에 대해 소상히 밝혔다.

오연주 엄마가 재혼을 해 낳은 아이가 지우였고, 그래서 성은 다르지만 분명 지우는 연주의 동생이 맞았다.

“우리 지우가 너가 정말 인상 깊었나 봐! 지우는 거짓말은 해 본 적 없는 앤데, 걔 말이 너가 손도 까딱하지 않고 나쁜 놈 쓰러뜨렸다고... 하하~ 얼마나 놀라고 감흥이 컸으면 그런 말까지!”


기남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 옆에 서 있는 지우에게 눈을 찡긋하면서 그저 살며시 미소를 짓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뭐 별거 아닌데 이렇게 찾아올 거까진 없는데...”

“그래도 그건 아니지! 내게 노상 소리나 질러대고 악담 퍼붓는 엄만 꼴 보기 싫지만 하나밖에 없는 내 동생 지우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보배거든! 내 동생 구해준 사람한테 당연히 인사해야지!”


지우는 서번트 증후군을 갖고 있는 자폐아였는데, 기억력과 숫자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는 아이라고 했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어눌해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특히 지난번에 만난 동네 형인 그 아이에겐 특히 먹잇감이었다고 했다.

워낙 기억력이 좋다 보니 기남이 준 종이쪽지를 잃어버렸지만, 전화번호를 기억해 누나와 함께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정식으로 꼭 하고 싶다고 하면서 누나한테 부탁했다고 했다.

연습을 많이 했는지 비교적 똑똑하게 지우가 기남에게 말했다.


“그때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들이 떠난 후 기남은 심사가 복잡해졌다.

뭔가 사연이 많은 거 같은 오연주에 자폐증상을 갖고 있는 동생까지, 그들의 삶에 자기가 개입하게 될 거 같단 예감이 강하게 들어서였다.


***


얼마 후 기남은 아버지 남두철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러 성북동집으로 향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집안 분위기가 왠지 싸했다.

서재에 앉아있던 남두철이 기남을 보자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 암이랜다. 살면서 못된 짓을 많이 해 결국 벌을 받는 건가 보다.”


기남은 기분이 묘했다.

미워하고 원망했던 아버지였지만 막상 몹쓸 병에 걸렸다니 마냥 좋지만은 않은 게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할 지경이었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기남이 여전히 입을 떼지 못하자 남두철이 두 눈을 껌벅이며 기남을 향해 입을 뗐다.

“못된 짓 중에 최고는 아마 너한테 했던 짓일 게다. 아비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기남은 여전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그저 자기 앞에 앉아있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아버지의 얼굴이 비현실적이라고만 느낄 뿐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라. 이 아비한테 맺혀있었던 게 있을 거 아니냐!”


기남은 아무 말 없이 그냥 서재를 빠져나왔다.

적절하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 한줄기를 힘껏 닦아냈다.


집으로 돌아온 기남은 아이들 생각에 빠져들었다.


‘민식이와 윤식이도 지금 나처럼 아버지인 날 원망하고 있겠지?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한 주제에 자기들을 고아로 만들었단 생각에?’


그러다 곧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회개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텐데.

난 그럴 기회가 없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꼭 그랬으면 좋겠는데.’


며칠 후 기남은 성북동집을 다시 찾았다.

오후 6시 반이었는데 이미 남두철은 집에 들어와 있었다.

기남의 방문을 반가워하며 직접 현관 앞까지 마중 나왔다.


“기남아! 그렇지 않아도 수소문해 널 찾으려던 중이었다. 너랑 의논해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우선 이리 와 앉거라.”


그런 남두철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진희는 쳐다보고 있었다.

요 며칠 달라진 그의 모습에 많이 놀라긴 했지만, 기남을 반가워하는 모습이야말로 진희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분명했다.


“흥! 부자상봉 아주 눈물겹네! 눈물겨워!”


그녀에게 눈총을 주던 남두철이 금세 눈빛을 누그러뜨리더니 진희에게 말했다.


“당신도 여기 앉아 봐. 중요한 얘기니까.”


진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옆에 앉았다.

남두철이 자리에 앉은 기남을 향해 입을 뗐다.


“그땐 왜 그렇게 후다닥 갔어? 좀 더”
“아니. 이게 처음 만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욧? 도대체 나 모르는 동안 둘이 무슨”
“저, 물 한 잔 좀 주시죠?”


기남이 진희 입을 막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진희가 날카로운 하이톤으로 외쳤다.


“아줌마! 아줌마!”


가정부가 왔고, 진희는 그녀에게 물 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당신 도대체 무슨 짓... 일을 꾸미고 있는 거에욧? 우리 정남이는 쏙 빼놓고 왜 기남이하고만”

“며칠 전에 아버지가 불러 집에 들렀었죠.”


기남이 차갑게 내뱉었다.


“왜 하필 나하고 정남이 없을 때!”

“아들이 아버지 찾고, 아버지가 아들 찾는 게 뭐가 문제죠?”

“너! 우리 집 나갈 때 벌어졌던 일 다 잊은 거니 설마? 너 어떻게 나가게 됐니?”

“정확히 말해서 나간 게 아니라 쫓겨난 거죠. 그것도 아주 억울하게!”

“뭐? 억울하게?”

“다 지난 얘긴 뭐 하려 하고 그래. 시끄러워!”


남두철이 진희를 꾸짖었다.

하지만 진희의 쫑알거림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 잘 됐다! 그럼 억울한 사연 한 번 들어보자! 뭐가 억울한데?”


냉철한 표정을 지으며 기남은 아버지 남두철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말씀하시기 전에 잠깐 이 문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남은 진희를 향해 눈 똑바로 뜨고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 일 제가 한 게 아니라 정남이가 한 짓이었죠. 이미 알았겠지만.”

“뭐라고? 아니 얘가 지금 누구한테 덮어씌우는 거야? 우리 정남이가 왜? 뭣 때문에?”

“그걸 왜 나한테 묻죠? 이미 알면서?”

“뭐라고? 아니 얘가 지금 누굴 잡는 거야? 우리 정남이가 허스를 왜 죽여? 아빠가 얼마나 사랑하는 갠 지 걔가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

“때론 호기심이 명확한 사실을 압도할 때가 있죠.”

“뭐? 뭐라는 거야 지금?”

“시작이 나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한 건 분명 나쁜 거죠..”


기남이 단호하게 응수했다.

이에 질 새라 진희가 입에 거품을 물고 대응했다.


“너 증거 있어? 우리 정남이가 그랬다는 증거 있냐고?”
“나한테 그 비싼 초콜릿이 있었을까요? 밥하고 먹을 찬도 부족했던 나한테?”

“뭐? 그렇다고 쳐도 그게 증거가 되진 않아. 너가 우리 순진한 정남이 꼬여서 개한테 먹이라고 했을 수도 있잖아.”

“순진한 정남이라? 자식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건가, 아님 알면서 모른 척하고 싶은 건가? 하하!”

“이미 다 지난 얘긴 새삼스럽게 왜 꺼내고 그래. 그때도 내가 잘못한 거 맞잖아! 이제 그만해!”


듣다 못한 남두철이 이렇게 둘의 말싸움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참견하는 남두철에게 꼴 보기 싫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티 내며 진희가 다시 악다구니를 부렸다.


“그래. 혹시 걔가 그러려고 했다 치자!. 그래도 너가 걔보단 한 살이라도 많으니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니니? 어린애한테 핑계를 대는 게”


기남이 대꾸를 하지 않자 분한지 진희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남두철은 그녀에게 따끔하게 일갈했다.


“언제부터 기남일 형 취급해 줬다고 그래? 방으로 들어가! 그러다 또 머리가 어지럽네, 어쩌네 하지 말고! 어서!”


마지못한 듯 진희가 투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가자, 남두철이 혀를 끌끌 차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안 봐도 다 비디오야. 네가 여기 살면서 어떤 고초 당했는지. 그것도 다 미안하다! 다 못난 이 아비 탓이다!”


잠시 생각에 젖던 남두철이 말을 이었다.


“기남아! 이제 나도 좀 사람답게 살고 싶다! 남은 생이나마 너한테 아비 노릇도 제대로 하고, 또 무엇보다 지금까지 엄한 데만 정신 쏟았었는데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인간답게 살아보고 싶어. 그래서 말인데...”


숨을 고르며 남두철은 스스로 기대에 부푼 듯 말을 이었다.


“일단은 재산의 반을 사회에 환원할까 해. 네가 장남이니 먼저 너한테 의논하려고 널 찾으려 했지. 그런데 이렇게 네가 다시 날 찾아와 줘 기쁘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의미 있는 일을 하실 생각을 하셨다니 저도 기쁘네요.”

“그래? 그럼 넌 내 생각에 동조하겠단 거지? 재산 욕심 버리고 좋은 일 하는 데 뜻을 같이 한단 말이지?”

“그럼요. 엄밀히 말해서 아버지 능력으로만 부를 축적하신 건 아니니까 세상에 돌려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죠. 다만...”

“다만 뭐?”

“아버지 뜻이 제대로 꽃을 피우기 위해선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겠죠.”

“옳지! 네 말이 옳아! 뜻이 좋아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

“그래서 말씀인데...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을 정리해 보시죠. 저 역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볼 테니까요.”

“그래, 그러자! 근데 말이야. 분명 정남 에미나 정남이는 반대하고 나설 거야. 그러니 이 일은 일단 너랑 나랑 우리 둘만 알고 있자. 괜히 분란 일으키고 싶지 않거든. 저 여편네 시끄럽게 구는 거 나도 이젠 아주 신물이 나!”

“네.”

“이왕 왔으니 오늘은 나랑 같이 밥 먹고 얘기도 좀 하고 그러자 기남아!”

“말씀은 감사하지만, 저도 해야 할 일이 있어 오늘은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뭐 바쁜 일이 있는 게냐? 오랜만인데 좀 더 있다 가지 그래!”

“조만간 또 찾아뵐게요.”


기남이 부드럽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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