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은 아버지 남두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성북동집을 찾았다.
“제가 그동안 생각을 좀 해봤는데요. 그전에 병원은 다녀오셨어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기남을 향해 남두철이 나지막이 말했다.
“응. 일단 키모테라피 계속 받곤 있는데...”
“키모 받으시려면 식사 잘하셔야 하니까 식욕이 안 나시더라도 잘 드세요.”
“그래, 고맙다! 그나저나 일전에 내가 말했던 거 뭐 좋은 아이디어 있니?”
기남이 아버지를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우선 아버지가 하고 싶으시단 좋은 일 중에 장애가 있어 특수교육이 필요한 사람을 위한 시설 하나 만들면 어떨까 싶은데요.”
“그러지 않아도 나 역시 그 생각해봤어! 넌 잘 모르지만 돌아가신 네 할아버지께서도 소아마비셨단다. 지금보다 그땐 장애를 가진 사람한테 차별이 더 심했지. 장애를 가진 사람 보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병신이라고 놀리고 했으니까. 그분 보면서 어려서부터 이 악물고 공부했어. 우리 어머니도 날 무지막지 밀어붙이곤 했지만.”
기남은 아버지의 이런 사연은 처음 들어본 거라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동시에 지기 싫어하고 고집이 센 아버지의 남다른 성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아버지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에 사무적이던 말투에서 어느덧 말투까지 바뀌며 말이 길어졌다.
“예전과 달리 요즘엔 신체보단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요. 한 마디로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진 않지만 아픈 거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시설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긴 하지. 일단 두 가지 다 가능한지 한번 알아보자.”
“그리고 하나 더요!”
“응? 뭔데?”
“보육원도 가능하면...”
“보육원?”
“네. 저도 사실 보육원에 들어갈 뻔했었죠!”
사실 원래 생에서 기남은 보육원 생활을 했었지만, 어차피 시시콜콜 얘기해 봤자 이해하지 못할 게 뻔하니 그 얘긴 뺐다.
“그랬어? 너 그 여자랑 살았었잖아? 이름이 뭐였지? 내가 한 달에 한 번, 돈 부치라고 비서한테 말했었는데...”
“유인희 씨요.”
“어, 그래!”
“그런데 문제가 있어서 그 집에서 나오게 됐고 보육원에 가려다 맘을 바꿨었어요. 기억하시죠? 제가 편지드렸었잖아요. 돈 저한테로 직접 부쳐달라고?”
“그랬었지! 기억나!”
“암튼 이젠 다 지난 일인데, 보육원 출신들 제가 좀 알거든요. 거기 애들 도움이 많이 필요해요.”
“그래. 알았다! 그것도 한번 생각해 보자!”
기남 아버지 남두철은 말이 중소기업이지 제법 알찬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해서 그가 자신의 많은 재산을 정리해 좋은 일에 쓰기로 작정한다면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남두철이 갑자기 기남의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너, 집으로 다시 들어올 생각은 없는 거냐?”
“집으로요?”
“그래. 요즘 부쩍 적적하단 생각이 자주 들어.”
“...”
“너하고 정남이 같이 보면 좋을 거 같은데...”
정신 차린 아버지가 다행스러웠다면 지금은 안쓰러워 보여 잠시 기남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정남이하고 정남모는 그렇게 생각할 거 같지 않아요. 그냥 이대로가 편할 거예요, 모두에게요!”
“그래도 한 번 생각은 좀 해 봐!”
“그리고 저 길러주신 분, 제게는 엄마 같은 분이에요! 엄마라고 부른 지도 꽤 됐고요.”
“하긴... 너가 엄마라고 생각할 사람이 그분밖에 더 있겠니? 내가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너한테 못할 일 많이 했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죠. 아버지가 많이 변하신 거에 전 의미를 두고 있어요. 지금부터라도 사회에 유익한 일 많이 하시기 바라고요.”
남두철이 스스로 대견하다는 듯 외쳤다.
“그래야지! 내가 생각해도 놀랍긴 해! 지금까진 죽도록 일하고, 가끔 여자들이나 만나 회포 풀고, 그런 낙으로 살았는데 막상 얼마 살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되니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기남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좋은 일 할 결심을 하고 나니 기분이 아주 좋더라, 이거야! 그것도 참 신기해!”
기남은 아버지를 자랑스럽다는 듯 바라봤다.
평소 자기를 피하던 아들이 장성해 자기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 듯 남두철 눈가에 살짝 이슬이 맺혔다.
“뒤늦게라도 좋은 일 하시겠다고 결심하신 건 정말 잘하신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란 소릴 몇 번 들어보지 않았지만, 이번 아버지 소리는 유난히 정답게 들려 남두철은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집에 완전히 들어오기 그러면 자주 와서 밥이라도 같이 먹자! 이번 주말 어떠냐? 토요일에 특별한 일 없으면 와서 저녁 같이 먹는 거?”
“네. 그럴게요.”
기남은 정남과 정남모 보기 껄끄럽긴 했지만, 아버지 청을 번번이 거절하기 뭐 해 토요일에 오기로 약속했다.
약속한 토요일이 되어 기남은 버스에서 내려 아버지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성북동은 버스가 거의 다니지 않아 주택가로 접어들려면 꽤 많이 걸어야 했다.
날씨도 좋고 볕도 좋아 기남은 기분 좋게 이른 저녁 시간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스포츠카 한 대가 기남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쌩하고 달려오더니 기남을 스쳐 지나가선 멈춰 섰다.
차 안에서 정남이 나오더니 기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나지막이 외쳤다.
“요즘 자주 집에 오네? 오늘은 또 웬일이지?”
“...”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해야 할 거 아냐? 여전하네! 도도하고 차갑기가!”
“특별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말이야.”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너 집에서 나갈 때 왜 끝까지 내가 했다고 말 안 했냐? 이상하게 난 그게 너무 궁금하더라고.”
“해봤자인 말 원래 난 안 해.”
“해 봤자라! 햐아! 역시 넌 뭘 좀 알긴 해! 해 봤자긴 했지! 당시 너 말 믿어줄 사람 아무도 없었으니까!”
진희로부터 아직 이야길 듣지 못했는지 정남이 승리에 도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곤 곧 정색하며 물었다.
“밖에 나가 사니 좋냐? 혼자인 기분, 어떤 걸까? 난 혼자였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서.”
“꽤 괜찮기도 해. 자신에게 충실할 시간이 많아지니까.”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집에 가서 얘기 더 하자. 탈래?”
“됐어! 걷는 게 좋아!”
“그냥 해 본 소리였는데 역시! 크크. 그럼 나 먼저 간다!”
멋쩍은 듯 정남은 차에 오르더니 거칠게 엔진을 스타트하고 떠났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기남은 생각했다.
‘저 인간을 어떻게 개조해야지? 난 상관없지만 아버지가 이제 꽤 신경이 쓰이실 텐데!~’
언덕을 좀 더 오르고 걸어 마침내 기남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 남두철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기남을 보고 훤한 미소를 지으며 기남 어깨에 손을 얹고 그는 기분 좋게 기남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한 정남 모 진희가 정남에게 팔짱을 낀 채로 기남과 남두철을 바라봤다.
“오늘 온 김에 지난번 했던 말 끝내자!”
진희의 차가운 어조에 남두철이 이마에 팔자를 그리며 인상을 썼다.
“그만하래두! 밥 먹으러 온 애를 왜 또 그래?”
“우리 정남이한테 덮어씌우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있어요?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보자는데 그럼 어떡하냐고요?”
핏대를 올리면서 진희가 반박했다.
“정 원하신다면요!”
기남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 없는 동안 내 얘기한 거야? 뭘? 왜?”
“밥부터 먹고 정남아! 자, 식당으로 가자!”
진희가 정남에게 팔짱을 끼우고 식당 쪽으로 정남을 밀자, 정남이 팔을 빼며 투박하게 말했다.
“밥맛 확 떨어졌어!”
“어허! 모처럼 형도 왔는데 말본새 하곤!”
남두철이 엄격한 어투로 정남을 나무랐다.
“아빠! 이제 기남이 왔다고 나한테 이러기야?”
마치 애가 떼를 쓰듯 정남이 철부지 행동을 하자 남두철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혀를 찼다.
“저저! 기남이가 뭐야 형이지! 형 반만 닮아 봐, 이 녀석아!”
이 말에 진희와 정남 모두 잡아먹을 듯 기남을 노려봤다.
말을 한 사람은 정작 남두철이었지만, 그들은 화살을 기남에게 돌렸다. 모자가 쌍으로!
그런 그들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남은 식당으로 향했다.
남두철 또한 모자를 본체만체하곤 기남을 따라 식당으로 갔다.
뒤에 남은 두 사람은 씩씩거리면서 마지못한 듯 뒤쫓아왔다.
그다음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살얼음판 같은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건 어디까지나 진희와 정남이 그런 것이고, 기남은 개의치 않고 편안하게 밥을 먹었다.
모처럼 아버지와 함께라 좋았다.
그리고 반찬 부족하지 않게 양껏, 맘껏 먹었다.
“장남 기남이도 이제 내 눈앞에 있고 난 이제 더 바라는 게 없다!”
“아빠! 자꾸 장남, 장남 하지 마요! 누군 장남 되고 싶지 않아 안 됐나? 다 아빠 탓이잖아!
아빠가 바람만 피우지 않았어도”
“누가 아니라니? 흥! 조강지처 멀쩡히 놔두고 딴짓 한 사람이 할 소린 아니지! 아암!”
진희가 독기가 가득한 표정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로 맞장구쳤다.
“그래! 다 내 잘못 맞지! 그래서 가장 피해 본 사람은 바로 여기 있는 우리 기남이고! 지 엄마 얼굴도 한 번 못 보고 당신 구박 다 받아 가면서 결국 억울하게 내쫓겼지! 바로 못난 내가 그렇게 만들었고!”
“억울하게? 흥!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요! 오늘 얘기 다 끝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