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우리 지우를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생각이었지.”
“하지만 그건 널 망치는 거야! 절대 그래선 안 돼!”
“그래. 네 말대로 이래선 안되지 하는 순간이 찾아와...”
오연주가 잠시 말을 끊고 생각을 가다듬는 듯 보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난 우리 지우를 위해선 뭐든 할 거야! 내가 없으면... 내가 없으니까 나 대신 지우를 괴롭힐지도 몰라.”
“내가 해결할게!”
“네가? 네가 어떻게 해결할 건데?”
“방법이 있어! 나한테 맡기고 넌 이제부터라도 공부에 전념해!”
“됐어! 너나 공부에 전념해! 난 내 일을 할 거야!”
기남이 연주를 포기시킬 방법은 딱 하나였다.
박재국 그 인간이 그녀가 사랑하는 동생 지우에게 더는 어떤 폭력이든 행사할 수 없게 만드는 거!
그래서 기남은 박재국을 찾아 나섰다.
예상대로 그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용역 회사 대표라는 직함을 가진 그는 많은 보디가드를 가까이 두고 있었다.
정상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외견상 그는 엄연히 회사의 장이었다.
그 세계가 그렇듯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칠 사람 또한 여럿이었다.
해서 기남은 박흥식으로부터 받은 정보를 이용해서 스스로 운동권으로 위장해 그를 면담하길 청했다.
드디어 그를 대면하게 된 날, 기남은 긴장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절차라는 이름으로 온몸을 수색당한 후 그는 마침내 박재국이란 인물 앞에 당도했다.
박재국의 첫인상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꽤 남자다웠다.
물론 겉모습이 그렇다는 얘기다.
그는 호기롭게 기남을 환영한다는 듯 처음 보는 그를 얼싸안았다.
“우리 애들이 기분 나쁘게 한 게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하기 바라네!”
기남에게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 청하곤 자기도 거대한 암체어에 앉았다.
“그래, 나한테 볼일이 있다고?”
“네.”
“용건으로 들어가기 전에 차는 뭘 마시겠나?”
박재국 나이는 40대 초반 같아 보였다.
하지만 하는 행동거지는 마치 50대처럼 중후하고 노련해 보이기 위해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동시에 허세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무 차나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담배 독 빼주는 녹차로 할까?”
“...”
그가 녹차를 주문한 다음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물었다.
그리고 기남에게도 권했다.
“전 담배 안 합니다.”
“아, 그래? 몸 생각해서? 흐흐.”
“...”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네. 지금까지 저희 애들 여러 차례 보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진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긴 했는데 제가 몸을 좀 사려야 할 처지라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듣자 하니 활약이 대단하다던데 이렇게 날 보러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용기이자 결단이지.”
“이제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해서 제가 보답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곧 마련될 듯싶습니다.”
“오, 보답은 무슨 보답! 말만이라도 감사하군!”
그때 차가 나왔고, 다기들도 함께 보였다.
따뜻한 물을 대접에 붓고 온도를 맞춘 다음 녹차를 우려내는 모양새가 꽤 진지해 보였다.
물론 거기에서도 진한 허세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박재국이 차를 찻잔에 따르며 말을 이었다.
“굳이 보답까진 아니더라도 우리 사이에 좋은 정보가 있다면 서로 교환하고 그러면 좋겠지. 안 그런가? 해서”
“네! 해서 드리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기남은 일단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파악한 거에 의미를 두고 그와의 만남을 끝내고 물러 나왔다.
그는 조심성이 몸에 깊이 배어 있으면서도 논리나 어떤 합리적인 사고보단 즉흥적이고 밀어붙이기를 선호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한 마디로 상대하기 그다지 어려운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집에 도착하니 인희가 신나는 얼굴로 기남에게 말했다.
“기남아! 나 그 인간하고 정말 이혼하게 됐어.”
“그래요? 잘됐네요!”
“그래. 이제 완전 남남 된다 생각하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저도 그래요, 엄마!”
“근데 요즘 너 왜 그렇게 바쁘니? 학교 공부는 뒷전인 듯 보이고.”
“네. 제가 좀 구상하는 게 있어서요. 다 엄마와 절 위한 거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그럼 난 정말 걱정 붙들어 매도되는 거지?”
“넵!”
며칠 후 기남은 아버지 집에 다시 들렀다.
지난번 식사 후 근 한 달 만이었다.
그날은 정남과 정남모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우리 둘이 오붓이 저녁 먹자! 정남이하고 정남 에미는 평창 별장에 갔어.”
“무슨 일 있었어요?”
“응, 아니... 사실은 내가 정남 에미한테 말했어.”
“...”
“너하고 의논한 일 말이야. 내가 사놓은 땅 정남 에미 이름으로 돌려놓은 게 있거든. 그게 필요하다고 했더니 금방 죽을 것처럼 사색이 되선...”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어요. 아버지도 그러셨죠?”
“그렇긴 하지만 내가 요즘 성질 많이 죽였더니 아주 이젠 기어오르려고 하고 있어.”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 보시죠. 그런데 정남이는 요즘 뭐 하고 지내죠?”
“아휴 말도 마! 정남 에미가 손써서 대학에 어찌어찌 들여보내긴 했는데 그나마도 적응이 안 되는지 친구들하고만 어울려 다니고. 아주 골치 아프다!”
“공부에 뜻이 없으면 자기가 잘하는 거 하게 하세요! 공부가 다인 세상은 끝나가요, 곧!”
“그 녀석이 공부나 뭐나 어디에 뜻이 있어야 말이지. 어려서부터 좋은 학교, 좋은 거 다 시켜봤지만, 끝을 본 게 없는데. 누굴 닮은 건지, 하여간 애물단지다!”
“...”
“그리고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다, 기남아! 아무래도 회사 네가 물려받으면 어떨까 싶은데 네 생각은 어떠냐?”
“제가 회사를요?”
“그래. 넌 장남이기도 하고, 너밖엔 없잖니? 그래서 내가 또 이 생각을 해봤어!”
“?”
“미국 가서 공부 좀 하고 와!”
“미국요? 유학을 가란 말씀이세요?”
“그래! 넓은 곳에 가서 많은 걸 배워와서 회사도 번창하게 하고 무엇보다 이제 점점 전문경영인 체제가 될 듯 보이던데 그렇게 하려면...”
“한 번도 그럴 생각을 해 보지 않아서요. 시간을 좀 주세요!”
“그래. 뭐 당장 가라는 건 아니야! 유학 가는데도 절차가 꽤 복잡한 거 같던데.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말이야.”
“네.”
기남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또 여러 상념에 빠져들었다.
자기가 유학을 가게 되면 연주와 지우는 누가 지키나 에서부터 인희를 혼자 두고 떠난다는 것도 염려가 됐다.
해서 그는 심사가 복잡해졌다.
혹시 유학을 갈 경우를 대비해서 그는 학교에 다시 가서 전과 과정을 더욱 세세히 알아봤다.
어느 날 기남은 연주와 지우를 집에 초대했다.
별 할 일 없이 늘 집에서 무료했던 인희는 아침부터 들떠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연주와 지우가 집에 도착해 그들 넷은 맛있게 저녁을 함께 먹었다.
“정말 다 너무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 중 최고예요!”
“네! 저도... 아주 맛있..어습니다!”
연주의 찬사에 지우까지 큰 목소리로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기남과 인희는 뿌듯했고, 기뻤다.
인희는 자꾸 연주에게 관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기남은 그런 인희 맘은 이해하지만, 연주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인희가 입을 뗐다.
“지우도 참 예쁘지만 난 연주 씨가 너무너무 예쁘다! 동생 챙기는 것도 예뻐 보이고!”
“아들만 키우시다 보니 연주 씨한테 눈이 더 가시는 거죠?”
어색함을 덜기 위해 기남이 이렇게 눙치자, 정색을 하면서 인희가 말을 이었다.
“아니! 정말 예뻐! 마음이 너무 예쁘잖아!”
“남동생 가진 누나들 다 저 같은데요 뭐!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주가 겸손하게 말했다.
“아니야! 다 연주 씨 같진 않지!”
“우리 누나! 정말 나 예뻐... 해요! 이 세상에 둘... 없어요! 오직 하나, 연주 누나!”
“그래 맞아! 마치 엄마가 아들 살피듯 하는 게 정말 기특해!”
그 말에 연주의 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홍조 띤 연주를 보자 기남은 그녀가 참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한테 땍땍거리던 모습은 온 데 간데없는 것도 신기했고, 아무튼 그녀의 선한 마음을 알아봐 준 인희에게도 고마웠다.
“그럼, 이참에 엄마 딸 하나 키우실래요? 아들 하나도 덤으로?”
기남을 제외한 모두의 눈이 크게 떠진 채 이렇게 말하는 기남에게로 향했다.
자기를 향해 모인 눈을 차례로 바라보며 기남이 입을 열었다.
“왜 내 생각이 이상한 건가?”
“그게... 나야 그럼 너무 좋지만...”
인희가 가장 먼저 자기 생각을 밝혔다.
그러자 기남이 다시 입을 뗐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고요. 연주와 지우에겐 따뜻한 가정이 필요하고, 엄만 사랑하고 보살펴 줄 자식이 필요하고. 이런 식으로요.”
“근데 연주 지우 부모님께서 그걸 허락하실지 그게 문제지!”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어요!”
연주가 잽싸게 말을 받았다.
“저나 제 동생이나 한 번도 집에서 따뜻한 가정, 뭐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저희들이 떠난다고 하면 오히려 좋아들 할 거예요.”
“아! 그래? 어쩜!~”
인희가 연주와 지우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는 자기 인생에 우리가 방해가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사람도 지우나 절 달가워하지 않고요. 지우가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안 순간부터 자식 취급도 안 했거든요.”
이렇게 말할 때 연주는 지우의 귀를 자기 두 손으로 잠시 막았다.
지우는 이미 익숙한 듯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하긴 가정이라고 다 똑같은 가정이 아니긴 하지. 집집마다 사연도 다 다르고, 보이는 게 다가 아니기도 하고.”
“저희 둘 거둬주시면 저희도 가족의 일원으로 저희들이 해야 할 일 열심히 할게요.”
“그래. 나야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니까”
“엄마! 엄마만 허락하시면 연주랑 지우 문제는 제가 연주랑 더 의논해 볼게요.”
“그래! 이제야 사람 사는 집 같겠구나! 벅적댈 거 생각만 해도 난 너무 좋긴 하다!”
네 사람은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기남의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기남은 알고 있었다. 박재국이 연주를 순순히 놓아주질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기남은 그에게 거부할 수 없는 딜을 제의해야겠다고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