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회귀 9- 고심하는 빌런 6

by 꿈꾸는 노마드

“마지막으로 물을게. 너 도대체 지우 아빠랑은 왜 싸운 거야?”

“뭐? 너가 그걸 어떻게?”

“지우가 말해줬어. 너 나가기 전에 아빠랑 싸웠다고.”

“상관 마!”

“너 데모했던 것도 그 사람하고 관계있는 거니?”

“...”

“내가 뭘 알아야 널 도울 수 있지! 제발 말해줘!”

“굳이 너가 날 도와야 할 이유가 뭐지?”

“그건.... 지우랑 우연히 만난 것도 그렇고, 우리 인연이 예사롭지 않아서 그래!”

“나도 첨엔 그렇게 생각했었지!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여기서 빠지는 게 좋겠어! 우리 모두를 위해서!”

기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는데, 난!”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란 말도 있어!”

“아니! 이미 너무 늦었어! 발 빼려고 할수록 늪처럼 더 깊이 빠질 뿐이야!”


이번엔 연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읊조렸다.


“나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하자!”

“너, 정확히 박재국이란 사람하고 어떤 사이야?”

연주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기남은 똑똑히 봤다.

“나 너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야. 나 믿고 다 털어놓으면 안 될까?”

“...”

“지우를 생각해 봐! 지우에겐 네가 전부던데...”

“나도 지우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더니 곧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거렸다.

그리고 찬찬히 기남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기남은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연주의 말을 듣고 보니 역시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란 걸 기남은 확인할 수 있었다.

박재국은 연주가 지우를 끔찍이 아끼는 걸 이용해 그녀를 자신의 정보통으로 이용했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듣지 않으면 지우와 엄마를 해치겠다고 위협까지 하고 있었다.

지우는 물론 아무리 미운 엄마라지만 그녈 해치겠다는 말에 연주는 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왔다.

지친 연주가 박재국의 청을 거절하다 둘 사이에 말싸움이 터졌고, 가출한 연주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아는 언니가 소개한 교회에 들어가 생활하고 있다.


'박재국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검은 사업을 위장하는데 순진한 학생들을 이용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들에게 피신처와 돈을 제공하는 대신 그들 머리를 빌려 자기들 사업을 확장하면서.'


기남이 생각하기에 그는 단순한 조폭이 아닌 지능적인 모사꾼이었다.

데모를 하는 애들을 도와주는 척 약점을 잡고 있다 그들을 써먹을 순간이 오면 이용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 중 어차피 인생 망쳤다고 생각하는 애들 중 똑똑한 놈은 골라 후에 용역회사에 취직시키기도 했을 거라는 걸 기남은 이전 생으로부터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이런 악질적인 놈을 처단하는 게 이번 생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임을 기남은 깨달았다.

폭력적인 그놈으로부터 연주와 지우, 그리고 연주 엄마를 반드시 구해내야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며칠 후 박흥식을 만난 기남은 박재국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들을 기회를 갖게 됐다.

둘은 그날 아주 오랜만에 예전 유영산 근처 할머니 국밥집을 찾았다.


“아이고야! 이게 누구여?”


할머니가 그들 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둘 다 신수 훤한 걸 보니께 성공들 했구먼! 흥식이네 이사 가고 여기 사람들은 매 한 가지지만 둘은 확 바꿔버렸당께! 흐.”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할머니!”


박흥식과 기남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그려, 나야 늘 그날이 그날이지만서두 둘은 어찌 지냈능가?”

“저희들 다 잘 지냈습니다!”


박흥식이 대답했다.


“보아허니 둘은 여직 형제 마냥 지나고 있나 본디.... 참 보기 좋구먼!”

“네. 제가 형을 너무 좋아해서요.”

“그려! 사람 인연이라는 거 소중히 여겨야지. 그라는 사람이 성공하는 거고.”

“저희 오랜만에 할머니 국밥 생각나서 이렇게 함께 왔는데 이제 좀 더 자주 올게요.”

“고맙구먼! 내 같은 사람도 생각해 주고!”

“참, 형 사시 합격해서 검사 된 건 아시죠?”

“그라쥐! 소문은 이미 들었구먼. 어무니께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참 순애도 잘 지내제?”

“네. 덕분에 다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에고. 이제 수다 그만 떨고 냉큼 국밥이나 말아올게. 기둘려!”


할머니가 주방 쪽으로 급히 떠나자, 둘은 그제야 자리에 앉아 숨을 돌렸다.

“형, 아까 하던 말 좀 계속해 봐. 그러니까 박재국 그 인간이 신분을 그럴듯하게 세탁했지만 조폭 출신이 확실하단 거지?”

“응. 그런데 잔챙이였던 그가 확 뜨게 되는 사건이 있었어.”

“그게 뭔데?”

“1976년 신민당 당사 습격 사건! 대낮에 각목과 쇠파이프 들고 쳐들어가서 테러를 가했던 사건이지!”

“나도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나네, 그러고 보니!”

“그때 앞장섰던 김태춘 옆에서 오른팔 노릇을 했었나 봐. 얼마 있다 체포됐지만 결국 훈방처리됐지. 그러다 다음 해에 다른 폭력 사건으로 같이 감방 갔고.”

“...”

“하마터면 나도 같은 시기에 감방 갈 뻔했지. 크. 네 덕분에 살아나 검사까지 됐지만.”

“아! 그때가 바로 그때였구나!”

“그리고 박재국 빵에 있을 때 운동권 애들을 첨 만났나 봐.”

“그리고 그 후 마치 운동권 애들 뒤 봐주는 사람인 것처럼 행세했고?”

“내가 생각하기에 벌써 그때부터 그냥 하빠리는 아니었고, 나름 빵에서 범털 행세를 한 거 같더라. 그러다 운동권 애들하고 안면을 튼 거고.”

“애초에 운동권 애들하고 왜 인연을 만든 걸까?”

“그게.... 민주화운동 하는 애들은 아직까진 사회에서 호의적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더 많거든. 걔네들이 어떤 불법을 저질러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수긍하는 쪽이기도 하고.

아마도 그걸 이용하려는 걸 거야.”


그때 할머니가 국밥을 들고 두 사람 앞에 나타났다.


“뭔 이야길 고로콤 재미나게 한다냐?”

“흐.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중이에요.”

“그려. 식기 전에 어서 들어!”

“네. 잘 먹겠습니다.”


국밥을 입에 넣은 박흥식이 감탄했다.


“역시! 바로 이 맛이야! 할머니 국밥은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그려? 영광이구먼! 바쁘니께 자준 못 와도 가끔 와서 먹더라고!”

“네. 그럴게요.”


기남은 국밥을 맛볼 새도 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이 상대해야 할 박재국이란 인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 같은 강한 예감 때문이었다.

기남은 연주의 그간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겉으로 봐선 부잣집으로 재혼해 들어간 엄마와 딸이었지만 폭력과 억압에 찌든 생활이 이어졌고, 그 결과 조폭의 돈을 용돈으로 받기 싫었던 연주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녀의 엄마 또한 배우였던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남편의 눈치나 살피며 살아가다 보니 그 스트레스를 어린 딸에게 풀기 일쑤였고, 이래저래 연주는 집에 맘을 붙일 수 없었던 거란 걸 이해하게 됐다.

그 와중에 비록 아버지는 달라도 어린 동생이 생겨 유일한 친구가 됐다고 그녀는 기남에게 말했었다.

“친아빠 얼굴도 모르고 배우 생활로 바쁜 엄마랑 살다 보니 다른 집도 다 우리 집 같은 줄 알고 있었어. 우린 친척도 없어서 내게 유일한 말벗은 일하는 아줌마였지. 그러다 정을 줬던 아줌마랑도 헤어지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됐고. 박재국 집 말이야.”

“...”

“그날부터 악몽이었어. 밤만 되면 그 사람은 엄마를 구타했어.”

“자칭 건달이란 자가 자기 아내에게 손찌검을 했단 말이야?”

“응. 엄마가 자길 무시한다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다 결국엔 폭력으로 끝났지. 난 첨엔 그런 엄마가 불쌍했지만, 그것도 잠시였어. 폭력을 당한 엄마가 그걸 내게 대물림 했거든. 손으로 때리진 않았지만 말로.”

“어린 너가 상처를 많이 받았겠구나!”

“그래서 사람이 무서웠어.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우릴 무시하는 거 같았고,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던 엄마도 그러다 보니...”

“...”


기남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기 과거가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자긴 남자였고 그나마 어려서부터 단련이 됐었지만, 연주는 연약한 여자에 갑자기 바뀐 환경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다 동생이 태어나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유일하게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연주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지우는 정말 예뻤어! 조그만 손과 발을 매일 쓰다듬었지.”

“지우가 보통 애들과... 그러니까 뭔가 좀 다르다는 건 언제 알았어?”

“태어나자마자 뭔가를 응시하는데 눈빛이 좀 이상했어. 그런데 난 첨엔 그게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어. 우리 지우가 그렇게 된 거. 아일 낳은 후 엄마는 지우를 쳐다보지도 않으려고 했거든.”

“...”

“물론 젖도 안 줬지. 그래서 일하는 아줌마가 늘 분유를 타서 줬어. 그리고 지우를 거의 그 아줌마가 길렀지.”

“엄마는 왜 그런 거지?”

“내 생각에 엄만 원치 않은 아이를 갖게 돼 그런 거 같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이제 아이 때문에 더 이상 못 하게 됐다고 생각한 거 같아.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야. 지우 이전에 그 사람이 엄마 일 못하게 한 거니까. 그런데도 엄만 자기보다 힘이 약한 지우를 상대로 화풀이를 한 셈이야. 우리 불쌍한 지우!”


누군 어린 생명을 상대로 화풀이를 하고, 누군가는 그 어린 생명을 보고 위로 삼았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기남은 물론 이런 자기 생각을 연주에게 표현하진 않았다.

그저 불행한 연주 집안 사연에 자기 과거가 오버랩되어 깊이 공감할 뿐이었다.

화, 목,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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