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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노마드 Nov 07. 2024

세 번째 회귀 3- 갈등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기남은 정완수를 만났다.

공교롭게 할아버지 장례식과 기남의 결혼식이 겹쳐 참석할 수 없었던 정완수는 사람을 보내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긴 했지만, 미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 기남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약속 날짜를 잡았다.     


“신혼여행 재미 좋았고?”

“응. 뭐...”     


기남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정완수가 기남을 놀렸다.     

“내 비서가 그러는데 신부가 보통 미인이 아니라고 하던데... 반응 왜 이러지? 아! 남기남이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는! 하하!”

“사업은 어때?”     


기남이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정완수의 사업이야기로 치고 들어갔다.     


“내가 말했던 거 어른들과 의논해 봤어?”

“응? 물론 해봤지!”

“뭐라고들 하셔?”

“휴대폰이 어떻게 대중화되겠느냐고 다들 난색을 표하시더군. 지금도 상위 몇 프로만 겨우 갖고 있는데 하시면서. 그리고 블랙박스도 비행기에서나 쓰지 차량에까지는 아직 멀었다고 하시던데?”

“미래에 투자를 해야 제대로 된 경영이 가능한 건데... 물론 국내 굴지의 그룹을 이끄시는 분들이시니 나보다 더 잘 아시겠지만 말이야.”     


기남이 립서비스로 토를 달긴 했지만, 그가 이렇게 적극 그 사업을 추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자신이 이미 1990년대를 어느 정도 경험해 봤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중반 이후 휴대폰이 대중화됐고, 실제 기남이 당시 하려고 했던 사업은 자동차 관련 블랙박스 쪽이었다. 

90년대 초 영국에서 최초 개발돼 94년에는 스웨덴의 사브라는 차량에 블랙박스가 장착됐던 걸 기회로 기남은 한국에서도 실용화될 수 있겠다 싶어 사업을 추진했던 경험이 있었다.

물론 그 사업은 꽃도 펴보기 전에 사그라들었고, 이래저래 기남은 낙심했던 기억이 뚜렷하게 남아있었다.

기남의 사정을 알리 없는 정완수는 그의 선견지명 정도로 여겨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한편으론 워낙 기남이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 자기 딴엔 어른들에게 꽤 어필했지만 허사였다.     


“사업은 선경지명도 필요하지만 운빨도 있는 거라시면서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셔서 일단은 후퇴했는데 내가 기회 봐서 다시 말씀 올릴게.”

“그래! 앞으로는 워드가 아닌 컴퓨터가 대세가 될 거고 그와 더불어 거기 관련된 IT, 반도체 산업이 크게 성장할 거야. 그러니 이런 쪽을 선점하면 분명 좋은 결과로 회사에도 이익이 되고 네게도 큰 기회가 될 게 확실해. 너의 능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정완수는 캐나다에서 만났던 선배의 말을 떠올리며 기남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선배 말대로 기남을 가까이 두고 친분을 계속 유지해야겠단 결심도 굳혔다.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한잔해야지.”

“그게... 내가 오늘 좀 급한 일이 있어 그러니까 한잔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오늘은 밥이나 같이 먹자.”

“그래? 많이 바빠? 정 그렇다면... 뭐 먹을까?”     


정완수를 만난 후 기남은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연주와 함께 아버지 집에 인사드리러 가기로 돼 있는 날이었다.  

   

***     


성북동에 도착한 기남과 연주를 남두철은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너라 새아가!”

“안녕하셨어요?”

“오! 그래. 너희들도 신혼여행 잘 다녀왔지?”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인사를 와야지 원!”     


진희가 뼈 있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남두철은 진희가 그러거나 말거나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기남과 연주를 번갈아 바라봤다.

암이 완치됐다곤 하지만 앞으로 또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그는 하루라도 빨리 손주를 보고 싶었다.

해서 굳이 이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요즘엔 허니문 베이비 뭐 그게 유행이라고들 하던데...”     


남두철의 말에 기남과 연주 둘 다 볼이 벌그스레해졌다.

옆에 있던 진희가 또 참견했다.     


“아휴 우물가에 가서 숭늉 달란다더니 꼭 그 짝이네! 아니 뭐가 그리 급해!”     


이럴 땐 미운 그녀였지만 쓸모가 있다 싶었다.

해서 기남은 이참에 쐐기를 박았다.     


“저희는 좀 더 있다가 2세 계획하려고요, 아버지!”

“뭐? 아니 왜?”     


남두철은 물러설 기미를 전혀 안 보이며 다시 재촉했다.     


“아비가 암이 완치됐다곤 하지만 그게 또 모르는 거거든. 난 손주 안아보는 게 소원인데!”     


거의 아이처럼 떼를 쓰는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기남은 할 수 없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정 그러시다면 다시 생각해 볼게요, 아버지!”     


기남의 말에 연주 얼굴에 홍조가 드러나며 연주가 부끄러운 표정을 짓자, 진희가 웬 내숭이냐는 식으로 내뱉었다.     


“표정만 보면 아직도 처녀 같네! 남자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숫처녀 말이야!”     


얄밉다 얄밉다 한들 저렇게 말하고 싶을까 싶어 기남이 한 마디를 보탰다.     


“네! 아직 저 사람 처녑니다! 누구랑 정말 달라서요!”     


정곡을 찔린 진희가 오버하느라 더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어머머! 그건 또 무슨 귀신씻나락 까먹는 소리람!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그만 좀 해! 새아기 부끄러워하는 거 안 보여? 이제 며늘아기도 봤음 처신 좀 가려서 해! 제발!”     


남두철이 드디어 호통을 치자 진희가 작게 쫑알거리며 식당 쪽으로 향했다.     


“그게 말이 돼? 신혼여행까지 갔다 와 놓고 처녀라는 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기남과 연주는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둘 다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해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연주였다.     


“아무래도 우리 계획 이대로는 안 될 거 같아.”

“...”

“우리 둘만 있다면 모를까...”

“어떤 계획을 말하는 건데?”     


기남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우리 그냥 애도 낳고 평범해 보이게 살자.”     


연주가 결심한 듯 말하자 기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난 괜찮지만 너한테 데미지가 많이 갈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결혼은 두 사람이 함께”

“그렇긴 하지. 하지만...”     


기남은 연주의 말을 끊긴 했지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 진심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해봤자 믿기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아서였다.     


“너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후회? 내가 왜 후회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

“내가 좀 알아듣게 말을 해 봐.”     


기남은 흔들렸다.

민식 윤식 엄마 혜린을 생각하면 절대 해선 안 될 일이 맞지만 사실 어쩌면 이건 전혀 그녀와 상관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이번 생에 그녀가 존재하는지 아닌지 우선 그걸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기남은 생각했다.

해서 그는 계속 침묵을 지킨 채 앞만 응시했다.

일단 내일 당장이라도 혜린이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가 봐야겠다고 결심하면서.     


***     


지금은 1989년. 

원래대로라면 이미 기남은 혜린과 결혼해 민식을 낳았다.

그들이 살던 곳은 강북구의 아주 작은 아파트였다.

기남은 일찍 일어나 그곳으로 향했다.

자기가 살던 아파트 주위를 돌아보며 기남은 과거의 시간들이 떠올라 잠시 센티멘탈해졌다.     


‘이곳은 하나도 변한 게 없군!’     


그러다 곧 마음을 다잡고 자기가 살던 동 앞에 차를 주차했다.

아침을 맞는 주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서둘러 아파트를 나서는 학생들, 출근하는 사람들, 산책을 나서는 노인분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바삐 움직였다.

그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차 안에 머무르던 기남은 차에서 내려 경비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경비원이 경비실 근처를 비로 쓸고 있다 기남을 바라봤다.     


“여기 주민분은 아니신 듯한데 무슨 일이신데요?”

“6동 803호에 부부와 아이가 살고 있는 거 맞나요?”

“네? 왜 그러시죠?”

“저 개인적으로 그분들과 조금 아는 사이인데 확실히 그분들이 여기 사시는 게 맞나 해서요.”

“그렇담 찾으시는 분들이 아니신 거 같네요. 그 집엔 젊은 부부만 살고 있거든요.”

“네? 젊은 부부만요?”     


그때 경비원이 아는 얼굴을 만난 듯 고개 숙여 인사를 하며 외쳤다.     


“마침 저기들 나오시네요.”     


기남이 경비원이 말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식 윤식 엄마 혜린과 처음 보는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그가 있는 쪽으로 함께 걸어왔다.

혜린은 기남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편해 보였고, 함께 있는 남자 역시 인상이 좋았다.

자긴 혜린을 보고 움찔했지만, 혜린은 자기를 봐도 전혀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기남은 깨달았다.     


‘그렇군! 원래 삶과는 모든 게 다 달라진 거로군. 그녀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서 살고 있고. 그런데 왜 여전히 우리가 살던 아파트에 그녀가 살고 있는 거지?’     


그러다 과거의 일이 떠오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부모가 없던 그녀가 언니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서 살고 싶다고 해서 여기를 결정했었지! 그러니 내가 아니더라도 지금 남편과 이곳에서 살고 있는 거로군.’     


기남은 차로 돌아가 운전석에 올랐다.

그리고 자기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혜린을 생각하며 어쩌면 더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그때 생각 하나가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아! 그래! 남편이 달라졌고 편해 보이니 몹쓸 병에 걸리지도 않겠지?’


윤식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에 걸려 유명을 달리해야 했던 혜린의 과거가 상기됐기 때문이었다. 

꼭 그러길 바라며 기남은 그곳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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