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남은 난감했다.
의붓동생과 처남이 연적이 된 상황을 맞게 됐으니 말이다.
한쪽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곡을 만드는 사람인 반면 평범한 사람은 아니고,
또 한쪽은 이제 막 연예 매니지먼트 일을 시작했지만 전도가 유망한 사람이다.
‘만약 채유라가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굴 선택하게 될까?’
이런 생각에 빠져있던 기남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다 기남은 다른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이제 회귀는 한 번 남았다.
민식과 윤식을 만나야 하고, 아이들 엄마 혜린도 만나야 한다.
그런데 현재 혜린은 잘살고 있는 듯 보인다.
몹쓸 병도 안 걸린 듯 보였고.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혜린은 이 세상에 없어야 할 사람이다.
어째야 하지?
지금 있는 가족들을 다 잃고 옛 가족을 찾아가는 게 맞는 걸까?
죽음을 맞는 혜린, 민식과 윤식이 다시 엄마를 잃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아니지! 혜린이 죽음을 맞기 전으로 가면 그녀를 살릴 수 있겠지?’
기남은 머리가 아파왔다.
그때 기남의 머릿속에 박흥식 큰 아들이 떠올랐다.
‘왜 그 아이를 보자 머리가 아파왔던 걸까? 기시감은 또 뭐고?’
그는 다시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해 눈살을 찌푸렸다.
기남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가운데 서랍을 열고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사진 한 장을 꺼냈다.
혜린이 죽기 얼마 전 처음 찍었던 가족사진이었다.
민식이 7살, 윤식이 6살 때였다.
그 후 몇 개월 지나 혜린은 손 쓸 시간도 없이 죽음을 맞았다.
혜린을 잃고 엄마 없이 혼자 아이들을 길렀던 시절 추억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
혜린을 잃은 한참 후 기남은 민식과 윤식을 데리고 첫 외식을 했다.
민식과 윤식은 둘 다 짜장면을 아주 좋아해 기분이 한껏 들떠 보였다.
특히 윤식은 표 나게 자기 기분을 드러내며 콧노래까지 불러 기남과 민식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짜장면 셋을 주문한 기남은 어린 아들들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가족이 없다 아내가 생겼고, 곧 연년생으로 두 아들을 갖고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 같았다.
그러다 아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어린 아들 둘만 남기고 자기 곁을 떠나버린 일, 이제 겨우 일곱, 여섯 살 된 아이들을 데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해 혼자 눈물짓던 일 등 가슴 아픈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그때 짜장면이 나왔고 기남이 짜장을 비벼주자 두 아이는 기뻐하며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다.
기남 역시 자기 짜장면을 비비기 위해 짜장면을 보다 아내 생각에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내 역시 아이들만큼 짜장면을 좋아해 가족의 외식은 늘 중국집에서 가졌었던 게 떠올랐고,
그와 더불어 아내가 짜장면을 보고 좋아하던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짜장면을 신나게 먹던 민식이 순간 생각에 잠기다 눈물이 고인 기남을 쳐다보곤 눈치를 살피며 먹기를 멈추고 기남을 바라봤다.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배려심 많은 큰아들인 민식의 이런 모습에 기남은 과장되게 눈을 비비며 말했다.
“아니, 이놈의 날파리가 왜 내 눈 안으로 들어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남은 먹성 좋게 짜장면을 비벼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안심한 듯 민식은 짜장면을 먹기 시작했고, 옆에 앉은 윤식은 둘 사이에 벌어진 일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짜장면을 물 마시듯 입안으로 쓸어 담고 있었다.
그런 윤식의 모습을 본 기남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윤식을 향해 입을 열었다.
“윤식아! 그러다 체해. 좀 천천히 먹어. 다 먹고 아빠 것 좀 더 줄까?”
“정말? 나 조금 더 먹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빠 거 조금 주실래요? 헤헤.”
기쁜 표정을 지으며 자기 것이 남겨져 있음에도 더 달란 식으로 윤식은 기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윤식에게 자기 짜장면을 덜어주는 기남을 바라보던 민식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 욕심쟁이. 지 거나 다 먹고 더 달라고 해야지.”
“아니야. 아빤 나오기 전에 뭘 좀 먹어서 좀 많다 여겨졌어. 잘 됐지 뭐. 더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먹는 게.”
민식이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아빠! 아빠가 자꾸 그러니까 저 녀석이 자기만 생각하잖아. 지 욕심만 차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가족끼리는 서로 나눠 먹고 그러는 거야. 배가 더 고픈 사람한테 배 덜 고픈 사람이 주는 건 서로에게 좋은 거잖아? 괜찮아 민식아! 아빠는 너희들 먹는 거만 봐도 이미 배부른데? 자, 불기 전에 어서 먹자.”
짜장면을 다 먹고 그들은 밖으로 나와 공원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공원에 도착해 셋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이제 차가워지기 시작하는 날씨 탓에 윤식은 손을 호호 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기남 옆으로 바싹 몸을 붙였다.
기남이 윤식을 바짝 자기 쪽으로 당겨 끌어안곤 민식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셋은 꼭 붙은 꼴이 됐다.
그러자 윤식이 기분 좋게 웃기 시작했다.
옆에 앉은 민식도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고, 기남은 어떻게 해서든 내 새끼들만은 고생시키지 말아야겠단 결심을 다시 한번 굳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 짜장면 하나 먹은 게?”
“아니! 짜장면도 맛났지만, 아빠랑 형아랑 이렇게 셋이 꼭 붙어 있으니까 넘 좋아. 로봇 합체처럼. 그지 형아?”
“응.”
민식 또한 콧구멍을 벌렁벌렁하면서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자상한 아빠지만 가끔은 무섭고 엄한 구석이 있는 기남이 오늘은 유달리 기분 좋아 보여 그것도 민식을 기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다.
그때 기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빠가 더 좋은 일 찾았거든. 그래서 내일부터 좀 늦게 들어올 거야. 민식이 동생 잘 돌보고 있을 수 있지?”
민식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윤식인 형아 말 잘 듣고 있을 거지? 아빠 올 때까지 형아 속 썩이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근데 아빠 얼마나 늦게 올 건데?”
“아빠가 조금 먼 데 가서 일해야 해서 그래. 집에 한 10시쯤 돌아올 거야.”
윤식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렇게 늦게? 그럼, 우리 저녁은 어떡해?”
“그게...”
“아빠 걱정 마세요. 제가 저녁 지어서 윤식이랑 먹을게요.”
민식이 어른스럽게 기남의 말을 받았다.
“네가? 너 밥 지을 줄 알아?”
“그럼요. 엄마 아팠을 때도 내가 밥 다 했어요. 전기밥솥에 쌀 씻어 넣고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걸요.”
“그래. 내 아들 참 기특하다! 역시 남기남 아들다워!”
그때 윤식이 끼어들었다.
“나도 할 줄 아는 거 있어. 난 냉장고에서 김치랑 반찬 그런 거 꺼낼 줄 알아.”
“그래? 에고 우리 막둥이도 너무 기특하다! 우리 새끼들 누굴 닮아 이리 똑똑하누!”
“그야 당근 아빠지. 아니다! 엄마도 닮았어. 형은 엄마 닮아서 책임감이 강하다고 아빠가 그랬지?”
“그럼! 그리고 넌 엄마 닮아 마음이 아주 따뜻하고.”
“근데 형은 누구 닮아서 공부 잘하는 건데? 그건 엄마야, 아빠야?”
“그건 아빠지. 아빠가 학교 다닐 때 공부 아주 잘했거든.”
윤식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근데 왜 아빤 회사 출근 안 해? 공부 잘하는 사람은 넥타이 매고 회사 출근하는 거잖아.”
“그건... 아빠가 사정이 있어서 공부를 끝까지 다 마치지 못했거든.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그럼, 나랑 형은 꼭 학교 마쳐야겠다. 그지 형아?”
윤식이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민식을 바라보며 그의 동의를 구했다.
그의 말에 민식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우린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해야지.”
민식의 말에 기특한 듯 민식을 바라보던 기남이 다시 둘을 꼭 껴안으면서 말했다.
“아빤 너희들만 내 옆에 있으면 아무것도 부럽지 않아. 내 새끼들 어서 부지런히 커라!”
***
기남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결심했다.
‘그 시절로 돌아가더라도 이미 내 안엔 갖춰진 게 많이 있지.
그걸로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무엇보다 혜린이를 살려내는 게 급선무고!’
마음이 초조해졌지만, 그는 좀 더 느긋하게 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 생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기남을 연주가 반갑게 맞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연주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인희가 방에서 나왔다.
“왜 이제 들어와? 오늘따라 유난히 늦었네?”
“저 기다리셨어요, 어머니?”
“그럼! 깜짝 놀랄 소식이 있거든.”
“??”
“아니다! 내가 하는 것보단 연주가 하는 게 낫겠다.”
인희가 연주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연주가 입을 열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