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는 차기작 작곡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지우를 보면서 정남은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어느 날 채유라가 지우의 작곡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채유라가 작곡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어떻게...”
지우가 말을 버벅거렸다.
“저 성공적으로 데뷔하게 해 주신 거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잖아요! 그래서”
“나 지금 곡 만드는 중인데...”
채유라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조용한 곳에서 둘이서만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
“얘기도 나누고 제대로 인사도 드리고...”
채유라의 조그만 입술이 달싹였다.
지우가 채유라 가까이 다가갔다.
“뭐라고?”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고 싶었다.
그의 행동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으며 채유라가 지우의 귀에 소곤거렸다.
“시간 되실 때 제 집으로 놀러 오실래요?”
지우가 놀란 듯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을 문질렀다.
“집으로?”
“네. 와인 한잔하면서 우리 얘기해요! 네?”
묘하게 끝을 올리며 콧소리를 냈다.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날 저녁 지우가 정남에게 말했다.
“정남 형! 나 오늘 혼자 갈 거야.”
“무슨 일 있어?”
“응.”
“나한테 말해 줄 수 없는 일인가?”
그쯤 지우는 정남을 형이라 부르면서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정남에게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속으로 지우는 갈등 했다.
가족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지우는 말하기로 맘먹었다.
지우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채유라가 자기 집에 초대했어, 날!”
“어?”
정남은 채유라가 지우를 집에까지 초대했다는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늦은 시간에 혼자 사는 집에 지우를 초대했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거기 가려고?”
“응!”
“...”
“여자가... 이런 초대 첨이야, 나!”
“...”
“안 가는 건 예의가 아니지?”
정남은 뭐라고 답변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묵묵부답인 정남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다 지우가 다시 입을 뗐다.
“형은 안 돼!”
정남이 지우를 쳐다봤다.
지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채유라가 조용한 곳에서 둘이서만!이라고 했거든.”
지우는 이 말을 할 때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정남은 지우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 거기.”
“어? 형도 채유라 집 알아?”
정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
며칠 전 정남이 퇴근을 하려는데 채유라가 정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제 선물 맘에 드셨어요?>
정남은 답변 대신 뜸을 들였다.
뭐라 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됐기 때문이었다.
<제 선물 맘에 안 드셨구나?>
여전히 정남은 침묵을 지켰다.
<그럼 이건 어때요? 우리 같이 한잔 하는 거?>
채유라는 뛰어난 노래 실력 못지않게 야망 또한 엄청났다.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고 자라 돈에 한이 맺혀 있었다.
아버진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손도 못 써보고 숨을 거둬야 했다.
그 와중에 하나 있는 오빠는 개망나니라 맨날 사고만 쳤다.
그걸 견디지 못한 엄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혼자가 된 채유라는 친척 집을 이리저리 전전했다.
정남은 이런 깊은 사연까진 몰라도 채유라 파일을 보고 그녀가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졌었다는 걸 짐작했다.
그녀에게 향하는 마음은 순수했지만, 그녀 자체가 순수할까에 대해선 의구심이 있었다.
해서 정남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뭐야! 이렇게 여자를 부끄럽게 만들기 있어요?>
정남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겨우 입을 뗐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다만 제가 좀 바빠서..>
채유라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러시구나! 알았어요! 시간 뺏어 죄송해요!>
전화가 끊어졌다.
정남은 그녀가 만만치 않은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정남이 겪어왔던 경험상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정남은 혼잣말을 했다.
“나 너 정말 좋긴 한데, 내 촉이 너랑 엮이지 말라 하네. 어쩌지?”
정남과 통화를 마친 채유라는 전화기를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흥! 고자세로 나온다 이거지!
나 좋아하고 있는 거 다 아는데 밀당이라도 하시겠다는 거야, 지금?
흥! 그런다고 포기할 채유라가 아니다 이거야!’
채유라는 살아온 경험상 알았다.
자기에게 곡을 준 지우도, 자길 살뜰히 보살피는 정남도 다 자기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는 걸.
겉으로 봐서 채유라는 작은 몸에 야리야리해 보이지만 몸매도 적당히 풍성했고 얼굴도 아기자기 예뻤다.
거기에 목소리는 풍부했다.
어려서 겪었던 트라우마로 성 자체엔 관심이 없었지만 그걸 이용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채유라는 자존심이 상해 침대에 몸을 확 던졌다.
그리고 혼잣말을 했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거지! 좋았어!”
채유라는 성공을 위해 지금 당장 자기에게 필요한 인물이 지우와 정남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다른 스타일이라 접근 방법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치 빠른 채유라 눈에 지우는 주무르기 쉬웠다.
단순하면서도 착해빠진 지우는 한마디로 쉬운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정남은 속이 다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 통화만 봐도 그는 그렇게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였다.
“묘하게 땡기는데? 너란 인간?”
전화를 끊고 정남은 생각에 잠겼다.
‘정작 칼자루를 쥔 사람은 지운데 왜 나한테까지?’
***
그랬었는데 역시 지우한테도 마수의 손길을 뻗쳤다는 걸 오늘 알게 된 거였다.
채유라 집은 당연히 회사에서 마련해 줬고 관심이 있어 알고 있었지만, 그 집으로 자기가 직접 지우를 데려다줄 건 예상하지 못했었다.
기분이 묘했지만 지금 당장 걱정스러운 건 지우였다.
그는 뜸을 들이다 입을 뗐다.
“오늘 채유라랑 뭐 할 거야?”
“얘기도 나누고 인사도 한댔어!”
“인사?”
“응!”
“매일 보는데 무슨 인사?”
“그게... 나도 몰라. 맞다! 매일 보는데 왜 인사한다고 했지?”
지우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지우는 여자가 혼자 사는 집에 남자를 불러들인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정남은 고심했다.
가지 말라고 한다고 가지 않을 지우가 아니라는 것도 너무 명백했고,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것도 너무 분명했다.
둘 사이에 있을 일을 생각하면 저 밑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그런데 그것보다 그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게 있었다.
지우였다.
능력 있는 가수이자 작곡가 지우, 게다가 형의 처남인 지우,
그것보다 어쩜 더 중요한, 자기가 매니징을 맡고 있는 천재 엔터테이너 지우.
사실 정남이 처음 연예 매니지먼트 회사에서 일하길 원했던 건 유명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그것으로부터 시작되긴 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적성에 맞았고, 재미있었고, 형의 기대와 칭찬에 부응하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제대로 뭐 하나 한 게 없다는 것도 이 일에 더 매달리게 된 계기가 됐다.
해서 정남은 열심히 해 형 바로 밑에까지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엄마 그늘을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이루고 싶은 게 생긴 거였다.
‘그런데 지우가 무너지면 절대 안 되지!
이게 바로 내 첫 관문인 셈인데, 지우를 못 지키면 나도 같이 골로 가는 거지. 암!’
정남은 지우를 꼭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해서 머리를 굴렸다.
“있잖아! 작곡한 노래 중에 좀 어색한 게 있던데 알아?”
“어색한 거?”
“응. 다 좋은데 끝이 좀 이상해.”
“아닌데. 그런 거 없는데.”
“아니야. 내가 지우 노래 한 두 번 들어보나? 좀 이상한데, 한 번 봐 봐!”
지우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시계를 보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약속 있는데...”
“내가 데려다준다니까. 걱정 붙들어 매고 한 번만 보자!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녹음도 들어가야 하는데.”
“그런가?”
지우가 계속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정남이 억지로 그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녹음실로 들어간 지우는 정남이 말한 노래를 찾아 검토하기 시작했다.
헤드폰을 켜고 피아노 치기에 몰두한 지우를 보며 정남은 한시름 놓았지만, 곧 지우가 헤드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아닌데? 한 번 내가 듣게 쳐 봐.”
그렇게 몇 번을 정남은 지우를 고치라고 설득했고, 지우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정남의 말을 따랐다.
거기엔 한 번 어딘가에 빠져들면 몰입하는 지우의 성정도 한몫해 시간은 마냥 흘러갔다.
곡 다듬기를 끝낸 후 시계를 보던 지우가 외쳤다.
“약속 시간 지났다!”
“그래? 어쩌지?”
“약속 시간 지나고 가면 안 되는데. 그치, 형?”
“그건 그렇지. 예의가 아니지. 그것도 첫 방문에서.”
“그럼 어떡하지?”
“뭐 오늘만 날인가,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다음 약속 잡으면 되지.”
지우가 전화를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보더니 외쳤다.
“채유라가 전화 열 번도 더 했어, 형!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