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은 아직 배송 중입니다

"버리지 못한 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by Serenitas

혹시 몰라서 쌓아둔 것들


팬트리를 열었더니, 이삿짐센터가 나왔다.
분명 작년 이맘때 한 번 싹 정리하고 “앞으론 물건 줄이고 산다”라고 다짐했는데, 왜 다시 이리도 꽉 찼을까. 유통기한이 지난 병조림, 한 번도 쓰지 않은 수세미 세트, 어디서 받은 건지도 모를 에코백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어느새 “혹시 몰라서”라는 주문을 달고 사는 마법사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혹시’가 좀처럼 오질 않는다는 거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 정리도 한다.
몇 해째 입지 않은 셔츠를 들고 서서, 이번엔 입어볼까 고민하다가 다시 옷걸이에 건다. 손에 쥔 건 옷이지만, 마음에 들고 있는 건 미련이다.
그 옷은 이미 내 삶에서 퇴장했는데, 나 혼자 이별을 미루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미니멀리스트를 꿈꾼다.
좋아하는 옷 몇 벌, 자주 쓰는 그릇 몇 개, 마음에 쏙 드는 물건들만 딱 있는 삶. 공간엔 여백이 있고, 마음엔 바람이 드는 살림.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백을 남겨두면 어느새 물건이 들어차고, 비워둔 공간엔 불안이 밀려온다. 혹시 없어지면 불편하지 않을까? 혹시 나중에 다시 필요하지 않을까?
그 ‘혹시’들은 참 집요하게 사람 마음을 흔든다.


오늘도 팬트리와 옷장을 정리했다.

마음 같아선 몽땅 비워내고 싶지만, 막상 손에 들면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언제 썼는지 기억도 안 나는 물건 하나에도 괜히 사연이 붙는다.
‘이걸 샀던 날의 기분이 어땠더라’, ‘이거 선물해 준 사람이 누구였지’, ‘한 번쯤은 다시 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망설이다가 결국,

조금만, 정말 조금만 비웠다. 딱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은 만큼.


버릴 때마다 마음이 쓰라린데, 이상하게도 버리고 나면 아무렇지 않다. 그게 또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든다.
그렇게 쉽게 잊을 걸, 왜 그렇게 오래 붙잡고 있었을까.


살면서 점점 알게 된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게 아니라, 그 물건에 얽힌 감정과 마주하고, 결국은 스스로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라는 걸.
머리는 알아도, 마음은 자꾸 망설인다. 삶을 가볍게 살고 싶으면서도, 막상 가벼워지면 불안해지는 그 모순이 사람을 고단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팬트리를 열고, 옷장을 들여다본다.
하루에 하나라도 비우다 보면, 아주 조금씩 여백이 생긴다.
미련이 빠져나간 자리엔 가끔 바람이 스쳐가고, 그 바람이 마음을 조금은 덜 답답하게 만들어준다.


나는 여전히 미니멀리스트는 아니지만, 미련을 조금 덜어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걸로도, 오늘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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