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엄마 오늘만 같아라."

by Serenitas

어머니는 육 남매의 막내딸이다. 그리고 육 남매 중 셋째였던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다.

아버지는 장남은 아니었지만, 일찍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큰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어머니는 맏며느리의 자리를 맡게 되었고,

결혼과 동시에 시어머니를 모셨다. 긴 병간호 끝에 할머니의 임종까지 지켰다.


그 후로 20년 넘는 시간 동안, 어머니는 집안의 대소사를 묵묵히 책임졌다.

두 분 삼촌의 결혼. 설과 추석, 그리고 해마다 여러 번 돌아오는 제사까지.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일주일 전부터 시장을 돌며 장을 봤다.

두 손 가득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돌아오면, 그때부터 부엌의 불이 꺼질 날이 없었다.

명절 하루 전날이 되면 작은어머니 두 분이 집에 오셨고, 그제야 본격적인 음식 준비가 시작되었다.


동그랑땡을 부치고, 산적을 꽂고, 나물을 무치며 하루 종일 부엌에 매달리셨다.

차례 전날 밤이 깊어갈수록 부엌의 온도는 더 뜨거워졌고, 어머니의 이마에는 땀이 마를 틈이 없었다.

명절 당일 새벽, 마지막으로 차례상을 점검하고, 음식을 정갈하게 차려낸다.

그리고는 온종일 친척들을 맞고, 대접하고, 돌아가는 길에는 양손 가득 음식을 싸서 보낸다.

모두가 떠난 뒤에야 어머니는 쉴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20년 넘게 집안의 명절과 제사를 지켜오셨던 어머니 앞에,

어느 날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큰아버지가 오랜만에 나타났다.

목사가 되어 돌아온 큰아버지는 차례도, 제사도 이제는 지내지 말라고 단호히 말했다.

신앙의 길에선 불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말의 뜻은 이해했다. 시대가 바뀌었고, 세대가 달라졌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무너져버린 건 단지 제사상이 아니라, 어머니가 묵묵히 지켜온 지난 세월이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이시던 "아이고 나는 좋다. 이제 힘들지 않겠다."라고 하시지만

그 뒤편 쓸쓸해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다.


어머니의 친정은 멀었다. 명절이면 시댁 식구들을 챙기느라 늘 바빴고,

친정에 가는 일은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렸다.

내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친정 나들이는 1년에 한두 번 남짓이었다.

그것도 급한 일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때뿐이었다.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늘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명절은 늘 시댁과 가족을 위한 시간이었고, 자신의 시간을 위한 명절은 단 하루도 없었다.


어머니의 세상은 늘 남편과 시댁, 그리고 자식들이 전부였다.

한평생을 헌신하며 살아오셨지만, 세월은 그 마음을 알아주는 법 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에게는 치매라는 이름의 병이 찾아왔다.

4급 판정을 받았고, 아직은 혼자 생활이 가능하지만,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며칠 전 이야기를 잊고, 같은 말을 반복하며, 어느 날은 자신이 놓아둔 물건의 위치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치매 약이 병을 낫게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단지 진행을 늦출 뿐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시간은 더 이상 어머니의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런데 오늘, 어머니의 컨디션은 믿기 어려울 만큼 좋았다.

억지를 부리지도 않으셨고, 했던 말을 반복하지도 않으셨다.

오랜만에 예전처럼 나의 안부를 먼저 물어오셨고, 다 큰 딸의 건강을 걱정해 주셨다.

따뜻한 말투, 선한 눈빛, 정갈한 말의 흐름. 순간, 내가 아는 ‘엄마’가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한가위가 되면 사람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말한다.

넉넉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긴 말이다.

오늘, 나는 그 말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속으로 되뇌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 엄마 오늘만 같아라.

모든 걸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예전처럼 기운이 넘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바란다.

지금처럼만, 오늘처럼만 있어 주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맑은 정신으로 나를 바라보고, 따뜻한 목소리로 내 걱정을 해주는

이 시간이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 주길 바란다.

오늘, 나는 아주 조용하고도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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