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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분 소피아 Mar 04. 2018

"죽인 새는 어디 있느냐?"

산사의 죽비소리와 같은 이야기

산골의 아침은 새소리에 잠을 깬다.

추운 겨울에는 그 많던 새들이 어디서 몸을 피하고 있다가 봄이 올락말락하기만 해도 나타나 모닝콜을 해주니 신통하기까지 하다.  

귀농하지 않았다면 죽었다 깨나도 누리지 못할 복이다.   

도시에서는 그 놈의 고막을 터뜨릴듯한 사발시계의 철 후려치는 소리에 잠을 깨다보니 하루 중 골 때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소리에 잠을 깬 산골의 아침은 머리가 온화하다.

거기에 햇살까지 보태주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늑함이 하루를 여는 마음에 자리잡는다.     

다락방에 올라가 작은 창을 여니 그들의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와 내 발등에 수북히 쌓인다.

반짝, 반짝반짝!!

보물이 따로 없다.     




새 하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꼬마 성자 루루’라는 책의 이야기다.     


오래된 사원에 영성이 빼어난 큰스님과 제자들이 살고 있었다.

큰스님은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유독 루루라는 제자에게 정이 깊었다.     

루루는 다른 제자들보다 경전을 잘 암송하지도 못했고, 표현능력도 모자라고 특별한 재능도 없는 제자였다.

그런 제자를 특별히 예뻐하니 나머지 제자들은 샘이 극에 달해 루루를 내쫓자, 두들겨 패자 난리를 친다.     

큰 스님이 그들의 속내를 읽고 모두에게 숙제를 낸다.

새를 한 마리씩 주면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인 후, 그 새를 해질녘까지 자신 앞으로 가져오라는 거였다.     

제자들은 새 한 마리씩 꺼내 가서 해지기 전에 죽은 새를 큰스님 앞에 내려 놓았다.

그러나 루루만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나타난 루루는 짹짹거리는 새를 그대로 들고 왔으며, 해지기 전까지 오라는 명령도 어긴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루루를 시기하던 제자들은 속으로 좋아죽을 지경이었다.     

큰스님이 살아있는 새를 그냥 들고온 루루를 보고

“네가 죽인 새는 어디에 있느냐?”

큰스님은 루루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스승님.... 스승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새를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승님, 제가 가는 곳마다, 어디를 찾아가든지 그곳에는 신이 계셨습니다.

신께서 보고 계시므로 이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큰스님은 루루의 생각을 읽어내고 경을 외워 죽은 새들을 살려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다.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요즘 귀기울일만한 내용이라 소개한 것이다.

모두가 편리함을 쫓느라, 권력을 쫓느라, 남보다 많이 움켜쥐기 위해서 일제히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내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진리가, 단순함, 소박함이, 겸손, 절제가 보호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환영받기는커녕 반등신 취급당하기 일쑤다.     

거기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남과 비교하는 마음은 하늘을 찌른다.

옆집 아이가 얼마짜리 영어 과외를 하니까, 누구 엄마가 명품을 걸쳤으니까, 누구네가 이태리 가구를 들여 놓았다는데....    

 

내 인생을 내가  주인이 되어 사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남의 인생이 내 인생의 잣대가 된다.

자전거와 같은 인생이어야 한다.

내 인생의 페달을 내가 밟으며 속도를 조절하고, 주위를 둘러보며 풍광을 눈에 넣기도 하고 가끔은 나무 그늘 아래 쉬어도 가고 말이다.     


그러나 KTX를 탄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나발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남들과 휠쓸려 가다보면 어느새 종착역에 와 있는 삶이라면 어떨까.

그러니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모든 것을 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가치는커녕  존재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 중 일 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성인이 40%나 된다고 하질 않은가.

그 일 년에 책 한 권 읽을 시간조차 아껴서 어디에 지성을 들이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장 자크 루소는

“보통 사람들은 삶의 방향을 결정할 때 타인의 견해에 의존하고 그들이 내리는 판단에 따라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데 반해 성자는 자신의 내부에서 솟아오르는 것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다.”고 했다.     

이제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꼬마 성자 루루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 보다는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얘기는 ‘나도 남의 말 할 처지는 못된다’는 거다.

   


산골은 아직도 반 이상이 눈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다.

그래도 절기는 못속인다고 개울물은 햇살을 받아 앳된 소녀처럼 해맑아 보이고 그 소리도 여물어지고 있다.     

개울가에서 한참 놀다보면 어느새 내 안에서도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는듯 진동이 느껴진다.

봄이 오기 전에 만사 재껴 놓고 청소를 해야겠다.

귀도 소제하고, 마음의 뜰도 비질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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