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살이에서 터득한 것들...
다른 계절에는 그런 바람이 없는데 가을에는 마음을 하늘에 대고 힘껏 헹구고 싶다.
그리되면 그동안 썩고 냄새나는 마음의 찌꺼기도 끄집어내어 하얗게 표백하고 햇빛에 가슴 구석구석까지 소독을 해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귀농하고 파아란 하늘에 푹 빠져 살게 된 이후에 생긴 간절함이란 생각이 든다.
욕심도, 미움도, 시기, 질투 모두 표백되면 산골의 넉넉함, 신비스러움, 너그러움 만을 담아두고 싶다.
아직은 귀농 촛자라서 도시의 잔재를 버리지 못한 채(버리지 못했는지 버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지...) 양다리 걸치고 살다 보니 머리가 갈피를 못 잡을 때가 허다하다.
그러니 나쁜 머리 고생시킬 필요가 뭐 있겠는가.
서리 걷이 하듯 서둘러 도시의 것들은 버리고 산골의 모습을 닮아야겠다 작정해본다.
그러면 제일 좋아할 친구들 얼굴들이 누굴까 떠올려본다.
홀딱 벗고 새, 새 이름과는 달리 방정맞은 소리를 내는 꾀꼬리, 달맞이꽃, 꿩 가족, 다람쥐, 미움 덩이 청설모 등이 친구가 생겼다며 펄쩍펄쩍 뛸 생각을 하니 빙그레 웃음이 묻어난다.
시골 일이라는 것이 미루어서는 안 되는 일이 많다.
도시에서야 오늘 못하면 내일 한다 해도 큰 무리가 없는 경우가 많지만 시골의 일은 다르다.
어제 한 밤중에 야콘과 씨름한 생각을 하면 오늘 정도는 늦잠을 좀 자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손목이 시도록 야콘을 캐고, 나르고, 포장하느라 곤죽이 된 몸뚱이를 곤질러 세워보지만 머리와는 달리 몸뚱이는 옆으로 옆으로 기울어진다.
생전 안 해본 농사일을 하니 아직은 길이 들지 않아 이렇게 삐끄덕거린다 생각하니 조급한 마음은 어디로 가고 이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귀농 밥이 쌓이다 보면 몸도 농사일에 길이 들어 척척 해낼 날이 있을 것이다.
잠시의 휴식을 마무리하고 어서 털고 나가야 한다.
상품가치가 있는 야콘은 따로 고르고 그 나머지 부러지고 유기농이라 굼벵이 먹은 야콘들을 씻어 효소(발효액)를 담가야 하기 때문이다.
안 그러면 얼거나, 시들거나 하여 미룰 수가 없다.
어쨌든 집에 있는 솔이란 솔은 다 꺼내 왔다.
하다못해 새 칫솔부터 항아리 닦는 솔까지 쓰임새나 크기에 관계없이 다 동원시켰다.
아예 바깥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콘 하나하나를 손바닥에 놓고 이 솔, 저 솔을 번갈아 가며 닦다 보니 끝이 없다.
한 시간이 넘게 문질렀는데도 남은 자루는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손목에, 허리까지 이젠 한계다 싶어 무식한 방법을 생각해냈다.
큰 고무통에 야콘을 쏟아붓고 지들끼리 부대끼게 계속 문지르는 방법을...
깨끗하게 씻기지 않을 것 같아 망설였는데 웬걸 몸의 흙을 물에 남겨두고 뽀얀 제 몸만 나오는 거였다.
솔로 하나하나 씻은 것보다 더 잘 씻기면 씻겼지 나쁘지 않았다.
허리를 펴면서 물속에 잔뜩 잠긴 야콘을 보았다.
우리들도 저 물속의 야콘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 잠겨 저마다의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서로 부딪치고 상대방의 단점을 보물찾기 하듯 집어낸다.
상대방의 티끌만 보고 그것도 모자라 제 것은 두고 상대방의 그것만 털어주겠다고 대들기 일쑤다.
그러나 야콘은 그게 아니다.
서로의 몸을 내어주어 서로의 흙을 털어낸다.
상대방의 것도 털어주고 내 흠도 털어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야콘 씻은 물을 쏟아버릴 때마다 같이 쏟아져 나왔다.
어둑어둑해져서야 야콘 씻는 일이 끝났다.
아마 하나하나 각자 씻는 방법을 고집했더라면 3분의 1도 못했을 것이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이치는 똑같다는 생각이 발걸음을 따라다녔다.
씻은 야콘을 수돗가에 두자니 얼어버릴 것 같아 제 몸에 맞는 이불을 덮어주었다.
달 아래 야콘을 두고 들어오는데 낮에 물속에서 뽀얗게 속살을 드러내고 웃던 야콘의 여운이 따라 들어온다.
우리는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 인색했다. 단점까지도...........
자신을 내어 맡기고 상대방이 내어놓은 것을 서로 보듬을 수 있을 때 모두가 맑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나부터....
걱정이 생겼다.
집 앞에 거의 차를 세워 두는데 언제부턴가 새 한 마리가 진종일 부리로 차의 백미러를 쪼는 거였다.
며칠째.
수돗가에서 일을 하다 '톡톡'하는 소리가 나기에 무심히 흘려버리다 뒤돌아 보니 아무도 없었다.
별일 아니다 싶어 하던 일을 계속하는데 다시 귀에 들어와 앉는 소리가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새 한 마리가 이 쪽 저 쪽 백미러를 번갈아 날아다니며 쪼는 거였다.
그러다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고 무어라 중얼거린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 친구를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자꾸 저려왔다.
쏟아놓은 배설물이 백미러 밑과 유리에 보기 싫게 쌓여 있다.
그러다 말겠지 하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는데 저물어도 뜰 줄을 몰랐다.
배설물이 문제가 아니라 밥도 안 먹고 그러고 있으면 탈진할 것 같아 남편과 머리를 짜냈다.
결국 차를 논가에 갖다 놓았다.
환경이 바뀌면 그 짓을 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러나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여전히 출근하여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내일은 먹이라도 먹고 저러는지 보초를 설 생각이다.
그래야 먹이를 뿌려 주던지 할 것 아닌가.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고 와서 홀로 마음을 쏟아내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 마음이 쓰인다.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