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 아낙의 슈퍼 약도라지 이야기
지난 글에서 작년 늦은 가을에 씨를 채취한 이야기까지 했다.
슈퍼 약도라지의 씨도 나도 혹독한 겨울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산골의 날씨는 어머어마하다.
허리까지 눈이 쌓이는 날도 많다.
그러나 그 혹독한 겨울 날씨도 귀농 17년 차가 되니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겨서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슈퍼 약도라지 씨도 나도 겨울의 터널을 잘 빠져나와 봄을 맞았다.
겨울과 봄 사이의 계절적 충격을 해소할 사이도 없이 작년에 심어 가꾼 슈퍼 약도라지를 캐기로 했다.
함께 공동으로 심고, 풀을 뽑아주고, 가뭄이 타는지, 노루가 뜯어먹는지 함께 관리해서 키운 4집이 모여 캤다.
다 캐고 나니 양이 좀 되었다.
이제 캔 슈퍼 약도라지를 4집이 나누어 가졌다.
이제는 죽이 되든(죽이 되면 안 되지만 하늘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일...) 밥이 되든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우리 몫의 도라지를 싣고 산골로 돌아왔다.
봄은 너나없이 워낙 바쁜 농사철이다 보니 바로 정식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가식(임시로 심는 것)을 하기로 했다.
가식을 안 하고 미루다가 고생해서 키운 것을 혹여 하나라도 죽일까 봐 다음 날 바로 가식을 했다.
가식은 내 몫이다.
귀농 주동자인 초보 농사꾼은 사과밭에 넣어 퇴비로 쓸 낙엽을 실어 와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보 농사꾼은 꼼꼼하지 못해서 사실 안 도와주는 게 더 고마울 때가 있다.^^
가식 하는 일이 나에게는 혼자 버겁기는 하다.
골을 파야 하지만 괭이로 살살 흙을 파는 일은 흙과의 놀이라서 정신이 산란하지 않고 차분해진다.
도라지는 한 해 뿌리박았던 곳에서 계속 3년을 크는 것보다 옮겨심기를 해야 좋다.
그런데 슈퍼 약도라지는 또 다른 큰 이유가 있다.
도라지 앞에 턱 하니 불어 있는 단어처럼 ‘슈퍼’로 자라야 할 인물이므로 그냥 딸에 심어서는 안 된다.
길고 너른 큰, 아주 큰 통에 집을 새로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 큰 집에 흙을 메워야 하고 일일이 심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지금은 야콘과 고추를 심는 시절이라 바쁘기 때문에 가식을 해두었다.
가식 위치는 집 옆 거북바위가 턱 하니 엎드려 있는 그 옆 밭에 괭이로 골을 죽 파고 밭에서 캐온 슈퍼 약도라지 1년생을 죽 줄지어 세웠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유치원생들 줄 서 있는 모습이라 참 이쁘다.
줄을 세운 다음은 흙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이곳은 해발이 워낙 높은 곳이라 저녁엔 동상 걸릴 수도 있고, 낮엔 햇살에 화상을 입을 수 있으니 파란 머리채만 빼꼼히 남겨두고 흙 이불을 덮어 주었다.
괭이와 호미로 골을 내는 일이 조금은 버거웠다.
난 쥐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잘잘한 손놀림의 농사는 선수급인데 힘들아가는 일은 젬병이다.
덩치는 황소라도 때려잡을 것처럼 생겼지만 죽었다 깨나도 쥐는 힘을 요하는 일은 못한다.
결국 괭이를 내던지고 호미로 골을 팠다.
내 힘에 맞는 도구라서 남들은 호미로 파는 일이 더 힘들다지만 난 척척 해나갈 수 있었다.
원래 농작물을 심을 때, 크면서 서로 방해되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심지만 가식은 임시로 잠시 머무다 가기 때문에 다닥다닥 붙여 심어도 상관없다.
슈퍼 약도라지 1년생을 일렬로 세우고 나니 어린 꼬맹이들 수영 전 줄지어 세워 놓고 준비 운동시키는 모습이 연상되어 혼자 웃는다.
산골에서는 혼자 웃고, 혼자 운다.
혼자 자신을 나무라고, 혼자 격려한다.
그게 가장 진실된 모습이라는 것을 귀농하고 알았다.
캐온 도라지들을 심고 흙 이불까지 다 덮어주고 나니 어둠이 저만치서 알짱거린다.
이제 손을 털고 내려오려니 거북바위 옆에 임시거처를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우리 집에 손님이 오기만 하면 이 귀한 대형 거북바위를 보기 위해 늘 오르내리는 곳이라 그곳에 ‘어린 슈퍼 도라지’가 들어앉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밟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귀농 아낙인 배여사가 그걸 간과할 리 없다.
일전에 전지한 나뭇가지들을 끌어와 적당한 길이로 톱질을 해서 잘랐다.
삽으로 땅을 파고 3개를 박아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가면 슈퍼 약도라지가 절단 납니다”라는 경고로 끈으로 줄을 쳐두었다.
이제 안심이다.
허리를 펴고 둘러보니 소꿉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삶이 놀이가 되도록 하라”는 개똥철학이 있으니 거기에 들어맞는 하루 일과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하루 만에 비가 왔다.
어린것들이 낯선 곳에서 자리 터 하느라 몸살이 날 텐데 단비를 먹었으니 보약이나 다름없다.
다음날 가보니 파란 이파리들이 축축 늘어져 걱정이 되었는데 비를 먹고 나서 가보니 파릇파릇 생기가 돈다.
금방 끝날 것 같은 야콘 심는 일과 고추 심는 일이 중간중간 비가 오는 통에 예상보다 늦게 끝났다.
캐온 슈퍼 약도라지를 이내 심겠다고 가식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며 다 썩어 버릴뻔했다.
처음엔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가식 하는 일도 힘들고 번거로운데 그냥 두었다가 서둘러 심을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다.
그러나 늦게 가더라도 천천히 순리대로 가자고 결정하길 잘 했다.
이번 슈퍼 도라지를 가식 하며 삶의 지혜를 또 얻었다.
나의 삶도 이렇듯 늦더라도 천천히 순리대로 가자고....
복사꽃구경하며 슈퍼 약도라지들이 잘 자라고 있다.
이제 다음 주 정도면 이 녀석들을 제자리에 심기 시작할 것이다.
너희들의 임시 집이지만 맘 놓고 잘 자라길 바라는 밤이다.
2016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