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귀농 이야기
밥만 먹으면 고구마 밭에 엎드려 풀을 뽑는다.
아니 뽑는 게 아니라, 낫으로 베어내고 있다.
비가 아주 적당히 자주 오니 풀만 자란다.
내 낫 솜씨가 풀의 '자람'을 못 쫓아가니 맥이 다 빠질 지경이다.
그래서 한 골 한 골 베어주고 나면 고구마 줄기들이 어찌나 시원하게 엎드려 웃는지 그 재미로 농사짓는듯하다.
풀만 베어주는 것이 아니다.
이 놈의 고구마 줄기가 몸만 땅에 박고 있어야 하는데 팔이며, 발이며 모든 신경을 다 동원하여 땅에 뿌리를 박으니 몸만 남겨 두고 나머지 것은 다 땅에서 분리시켜야 한다.
그래야 열매가 튼실히 열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놈의 영양가 없는 줄기들이 땅에 더 깊이 박혀 여간 힘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또 기운대로 잡아당기다가는 줄기가 잘려 나가는 사태를 당해야 한다.
그러니 이 고구마 줄기 떼어주는 데도 적당한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하물며 우리네 삶에는 얼마나 '힘의 균형'이 필요할까.
귀농 5년 차에 벌써 이런 중차대한 농사 파악도 하고 스스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며칠 품을 사서 가공실 공사를 하더니 초보 농사꾼이 아주 피곤한 모양이다.
일은 일꾼이 했는데 피곤하기는 초보 농사꾼이 다 짊어지는지...
사람을 부린다는 표현을 좋아하지는 않는 사람이지만 하여간 피곤한가 보다.
게다가 일하다 허리까지 다쳤으니...
오늘은 창고, 가공실 주위의 널브러진 자투리 자재들을 분리수거 먼저 한단다.
나는 낫 하나 들고 고구마 밭으로 향하고...
고구마 밭을 매며 생각해 보니 벌써 9월인데 올여름이 그리 더웠다고 해도 아이들 데리고 계곡에 수영하러 간 적이 단 한 번이다.
물론 아이들은 친구들과 모여 계곡 등으로 수영을 다니지만 온 가족이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데...
자연에서 맘껏 놀게 해 준다고 하고 데려온 아이들인데 이건 아니지 싶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드니 일이 진행이 안된다.
그런 자책을 하는 중에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왔다.
일단 귀농 주동자인 초보 농사꾼에게 바람을 넣어야 하는데 저 사람 지금 그럴 정신이 아니라 말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
귀농이 아이들 때문이라는 사람 아닌가.
9월이라 이제 데리고 가고 싶어도 추워서 물에 못 들어간다는 둥...
올 들어 물놀이 우리가 데리고 간 것은 딱 한 번 뿐이라는 둥의 이유를 초보 농사꾼에게 들이댔다.
일단 이 정도로 말을 흘리면 초보 농사꾼 역시 대기업의 과장 자리 내던지고 왜 귀농했는지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으니 이내 약발을 받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초보 농사꾼이 내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바람을 넣는다.
그러자 일제히 들려오는 고함소리.
"앗싸~~ 수영이다.~~~"
수경, 수영복, 슬리퍼, 수건... 알아서 척척 준비한다.
귀농하고는 무엇이든 스스로 하도록 한다.
해외여행을 해마다 가는데 그럴 때도 캐리어 하나씩 주면 두 놈이 알아서 자신들의 짐을 다 챙긴다.
준비물을 챙기자마자 소광리 계곡으로 가느냐, 불영계곡으로 가느냐 둘이 상의를 하더니 소광리 계곡으로 간단다.
소광리 계곡은 고요 그 자체다.
불영계곡의 남성적인 멋이 있다면, 소광리는 여성적이다.
소광리 계곡은 구석구석이 아기자기한 자연의 숨소리를 품고 있다.
다만 숲 속의 동물 친구들의 일상 이야기만이 들려오겠지만 그 역시 물소리에 섞여 음악으로 다가온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
어디서 본 것은 있어서 올림픽 때 수영 선수들이 선수 소개할 때 손을 높이 쳐들더니만 그 모습을 서로 하며 웃는다.
그 웃음소리는 물소리에 섞였다가, 물 위로 솟아오른다.
저기에 섞여 놀아주어야 할 초보 농사꾼은 허리가 아파 꿈쩍을 못한다.
돗자리에 누워 책을 보지만 마음은 아이들과 물속에 있으리라.
허리만 받쳐준다면 그는 아이들과 다이빙을 하며 잘 놀았을 것이다.
한참을 놀던 아이들 아니나 다를까, 추워서 도저히 수영을 못하겠단다.
이리 안타까울 수가.
오후 나절은 아이들과 보내기로 맘먹고 왔는데 계절은 그때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창 더울 때는 어찌나 바쁘고 정신이 없던지.
초보 농사꾼에게 바람을 못 넣었었는데...
정말 아이들이 우선순위라면 올해 역시 아무리 바쁜 와중에라도 들로 계곡으로 데리고 왔어야 옳았다.
모든 것엔 때가 있음을...
그래도 안타까워 아이들과 돌 장난을 했다.
이제 물에서 노는 것은 올해는 틀렸지 싶다.
가을이 서서히 물드는 소광리 계곡에서 추위에 오들 오들 떨며 수영하던 때를 그래도, 그래도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이제 가을은 더 산골 가족의 지척에서 알짱거릴 것이다.
(이 글은 2004년 9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