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씨,시 읽어 줄까요>
"책은 숲이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 곁에서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
고즈넉한 풍경을 보면 '저기서 책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떠올라."
이 글은 얼마 전에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그런데 내게 책 다음으로 숲과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건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림이 내게 속삭이는 말은 밤을 지새워도 끝이 없다.
<고흐 씨, 시 읽어 줄까요>라는 책은 제목을 듣자마자 벌써 내 마음을 달뜨게 만들었다.
고흐라는 그 이름만으로...
고흐나 헤르만 헤세처럼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 밑바닥에서 돌수제비를 뜬 것처럼 감정들이 출렁거린다.
그랬으니 이런 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 난 읽고 있던 책들이 집구석을 낙엽처럼 뒹굴러 다녀도 눈 하나 끔쩍 안하고 샀다.
이운진 작가의 책은 처음이다.
이 책은 누군가 옆에서 그림을 읽어주듯, 시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듯 소곤소곤 이야기가 전개된다.
“청춘이라고 해서 삶이 눈부시게 반짝이는 건 아니었어. 표정을 감추고 나를 쳐다보는 세상에서 오히려 혼자 견뎌야 할 감정들만 많아질 뿐이었지. 그런데도 나를 다독이는 방법은 잘 몰랐어. ”(5쪽)
작가는 청춘일 때 그림을 만나게 된 일을 설명함으로써 책을 열고 있었다.
“”그림 속에 담긴 화가의 마음을 시처럼 읽고, 시인이 쓴 이미지를 한 폭의 그림처럼 상상하는 일은 인생의 더 많은 빛깔들을 열어 주었어.“(6쪽)
그림을 읽어주는 형식의 책들은 나도 많이 읽었다.
사실 그림에 까막눈인 나로서는 누군가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뭔가를 알아먹던 시절에 나의 눈을 뜨게 해주던 책들이었다.
난 결국 남의 도움으로 조금씩 그림에 눈을 뜬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조금씩...
어린 아이 걸음마하듯이 말이다.
내가 감동받은 환상의 조합 몇 점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맺고 싶다.
카미유 피사로의 <빨래 너는 여인>의 그림과 강은교 시인의 <빨래 너는 여자>가 같이 어우러진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
강은교 시인은 그렇게 <빨래 너는 여자>를 표현했다.
카미유 피사로가 그린 그림 속 빨래를 너는 여인과 그 옆 잔디에 앉아 엄마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가의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다.
그림으로 보아 아이는 아직 걸음마 수준인 것 같다.
'엄마 어디 안가고 빨래 널고 있으니 거기 앉아서 엄마를 보렴'했을 것만 같다.
엄마의 두 손은 빨래에 가 있지만 시선은 아가의 눈과 맞닿아 있다.
엄마와 아가!!!!
그 환상의 시선이 맞닿았으니 그림 속 햇살보다 독자의 느낌이 더 뜨겁다.
시와 그림의 조화로움도 버거운데 거기에 이운진 작가의 설명 또한 친구처럼 푸근하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뜨개질 수업>은 문태준시인의 <두터운 스웨터>가 한 조를 이루었다.
밀레하면 너나 없이 떠오르는 건 <만종>이 아닐까.
그는 농촌의 모습을 화폭에 많이 담은 화가이고 내가 알기로 고흐 또한 밀레의 작품을 많이 모작했고, 밀레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안다.
말이 샜다.
여하튼 <뜨개질 수업> 그림에 문태준 시인은 이렇게 시로 답한다.
“..엄마는 엄마가 입던 스웨터를 풀어 누나와 나의 옷을 여러날에 걸쳐 짜네
봄까지 엄마는 엄마의 가슴을 헐어 누나와 나의 따뜻한 가슴을 짜네"
이 시는 엄마와 자식...
‘엄마의 사랑은 가슴을 헐어내는 정도야 일도 아닌 거지‘ 라며 옹알이 하며 읽게 되는 시다.
문태준 시인의 시는 그래서 좋다.
고흐의 <감자먹는 사람들>
천재 화가가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면서 사람의 두상을 몇 십번을 그렸다지...
고흐의 <영혼의 편지>라는 책에서 그 대목을 읽고 목젖이 뻐근했었다.
그리고 또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명작이 탄생한다는 것을 또 배웠다.
고흐의 작품과 짝이 된 시는 김선우 시인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시인데 사실 난 고흐의 작품과 시인의 시가 어쩌면 제목만 조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흐 작품과는 조금 ...
그리고 또 내 눈에 오래 남아 있는 파편은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이라는 작품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아!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느 책 표지인데....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라는 책 표지였다.
처음 내가 <희망>이라는 그림을 보았을 때 제목이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 아니고 <절망> 아닌가? 라는..
눈은 가리워져 있고, 악기의 줄은 다 끊어지고 달랑 하나만 남았다.
맨발의 여인은 간신히 줄끊어진 나무 악기에 기대어 있다.
“누구에게나 소망의 줄이 끊어질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남은 한 줄로 끝까지 음악을 연주해 내려는 그녀가 바로 희망의 메시지라고 생각한 거지...”(147쪽)
“그림속의 여인처럼 눈이 가려졌어도 내 손끝을 믿고 연주하려는 것. 그것이 진짜 희망이라는 말이야. 만약 저 악기의 줄이 강철로 만들어진 거였다면 잘 끊어지진 않았겠지만 결코 아름다운 소리가 나진 않았을 거야.”(148쪽)
작가는 그렇게 풀이했지만 난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된 상황, 연주할 수 있는 줄이라곤 달랑 한 줄로 연명하고 있다면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이제 더이상 바닥으로 떨어질 것은 없고 조금씩 떠오를 일만 남았으므로 <희망>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 또한 루마니아에서 소련의 강제수용소로 가게 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삶을 충격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그랬으니 무엇이 희망인지를 설명하려는 의도로 책 표지를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이라는 작품으로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이라는 그림은 천양희 시인의 <희망이 완창이다>가 한 조합이다.
<희망이 완창이다>
절망만한 희망이 어디 있으랴
절망도 절창하면 희망이 된다
희망이 완창이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다.
마지막 그림은 독일군이 독가스를 공격하는 바람에 영국군 병사들이 눈이 멀어 붕대로 가린채 앞사람의 어깨를 잡고 감잡으며 앞으로 나가는 모습이다.
앞사람의 어깨를 놓치면 안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평탄한 길도 아니다.
눈가린 병사의 발 밑엔 죽은 병사의 시체와 누군가 손을 잡아주길 기다리는 눈가린 또 다른 병사들이 널브러져 있으니 가는 길도 험난하다.
이런 상황을 최명란 시인은 <아우슈비츠 이후>라는 시로 옮긴다.
<아우슈비츠 이후>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었고
서로를 갉아먹는 쇠와 쇠 사이의
녹 같은 연애를 했다
역사와 정치와 사랑과 관계없이
이 지상엔 사람이 없다
하늘엔 해도 없다 달도 없다
모든 신앙도 장난이다
그림도 시도 모두는 삶의 한 파편을 설명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 극복해야 하는 일이 그려지고 시로 쓰여진다고 믿는다.
우린 그런 시를 읽고, 그림을 눈에 넣으며 펌프 속에서 내일은 희망이 콸콸 나올 것을 점치는 것이다.
책 속에는, 화폭에는 삶을 비껴간 것은 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책 옆의 다 식은 커피잔을 들었다.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