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가족의'태풍 루사'이야기
(이 글은 2002년 태풍 루사가 몰아친 날의 글입니다.)
지금은 밤 11시이다.
온 천지가 검게 그을리고 그 그을린 위로 비가 퍼붓는다.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니 작은 오두막 정 중앙에 위치한 마루의 온갖 것들도 얼떨결에 제 몸을 흔든다.
전기가 나간지 좀 되었다.
집앞 도로가 사정 없이 쓸려 내려가 산허리가 잘려나간 모양을 하고 있다.
봄,가을, 겨울에는 존재 자체를 감추고 있다가 장마철에는 기승을 부리는 놈이 지금은 '기승' 수준이 아니다.
아주 발광을 하며 무섭게 달려든다.
서울에 살 때는 이런 자연재해에 무감각했는데 귀농해서는 그냥 내 코 앞의 일이다.
무슨 폭포가 하나 생겨 온 천지의 것을 다 쏟아내고 있는 것 같다.
하늘에는 구멍이 나도 보통 난 게 아니다.
하기야 그것도 하늘 마음이다.
개울의 포효하는 물줄기는 길을 당근자르듯 싹둑 잘라내고도 성이 안풀리는지 이번에는 논을 치고 지나간다.
건달이 지나가는 사람을 툭치고 지나가듯...
한 번 칠 때마다 떡물어뜯기듯 논이 뜯겨나간다.
거기까지도 좋다.
논으로 들어가는 곳에 전봇대가 서있는데 이젠 그게 눈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지금 물과 전봇대는 너무 친해져있다.
곧 흔적도 없이 사라질 위기다. 전봇대가...
그러다 보니 개울물줄기와 전봇대를 지탱하고 있는 흙의 폭은 내 작은 손 한 뼘 밖에 안된다.
차라리 손전등을 끄고 들어온다.
잠시 후면 개울밑에 묻은 그 큰 하수관이 떠내려가듯 회색의 길다란 놈이 또 하나 떠내려가겠지.
그러는중에 촛불까지 꺼진다.
성냥을 찾는다.
늘 두던 곳이어도 손놀림이 예전 같지 않다.
비오는 날에는 성냥도 습기를 끌어안아 제대로 안켜진다.
불을 붙인다.
나방이 허락도 없이 불에 뛰어든다.
방금 전에도 그리해서 촛불이 꺼진 모양이다.
다시 이야기를 할까?
오두막이 혹여 산사태를 만날까 두려워 군불을 땐다.
오두막 맨 오른쪽에 구들방이 있는데 그 방이 그래도 산과 조금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네 식구 그 작은 구들방에서 산사태를 조금 피해보고자 하는 속셈이다.
선우는 보초선다더니 몸이 안따라 준다며 잔다.
한참 후에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며 나온다.
화장실도 갈 수 없다.
물이 그 길을 가로질러 욕을 하며 지나가고 있으니 그 또한 여의치 않다.
오두막 조금 떨어진 곳이 패여 거기에도 큰 물줄기를 그리며 내려간다.
휴지와 손전등, 우산을 두 부자에게 챙겨 내보낸다.
선우가 다리를 벌리기에도 적당한 사이즈이다.
두 부자가 일을 처리하고 들어오자 주현이가 말참견을 한다.
"오빠, 산골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생겼다. 그치?"
"맞아, 비만 오면 생기는 수세식 화장실이네. 눈깜박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쓸려내려 갔어. 와. 근사하다."
그리 떠드는 것을 보니 배가 안 아픈 모양이다.
전기가 끊기면 완전 자동으로 물도 끊긴다.
물도 모터 펌프로 지하에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빗물을 받아 마시고 씻고를 해야 한다.
처마 밑에 양동이를 두 개 가져다 놓았다.
하나는 식수용, 하는 허드렛 물.
수돗물을 틀어놓은듯 금방 빗물이 차서 넘친다.
날이 어두워지니 모든 것이 어둠에 가려져 있다.
다만 개울물 난리치는 소리와 지붕의 함석 두들기는 소리로 상황을 예측할 뿐이다.
지금은 11시 50분이다.
초보농사꾼 한 번 순회하고 온다며 비옷을 입고 손전등 들고 나선다. 뒷곁으로, 화장실 길로, 개울가로, 논둑으로 둘러올 것이다.
이제 들어와 비옷을 벗는다.
"별일 없--죠?"
".................."
"별일 없냐구요?"
"저기 , 저기 논이 많이 쓸려갔구. 전봇대도 좀 심각하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제구실을 못하니 조급증이 난다.
이 태풍소식을 어디에서라도 들어야 하지만 모든 것이 먹통이다.
그래도 전화는 돼니 감지덕지하다.
그렇다.
컨테이너 옆에도 산과 밭 사이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있다.
그 또한 비만 오면 좀 컸다고 아래 개울 못지 않게 기세등등하다.
거기에도 초보농사꾼이 큰 하수관을 묻었는데 흘러넘쳐 마당에 우리 엄마 이마마냥 골을 다 파놓았다.
지금은 밤12시다.
귀만 제 구실을 할 뿐 눈도, 코도 다른 기관은 쓸모없이 귀에 기대산다.
어제 첫물을 딴 고추밭은 현재 안중에도 없다.
다만 오두막 뒤통수가 걱정일 뿐이다.
오두막은 뒤의 산과 바로 붙어 있어 산사태가 걱정이다.
네 식구 안전하기를...
게다가 오두막 뒤쪽을 포크레인으로 긁어내고 장독대를 만들었는데 자꾸 그 쪽으로 뒤통수가 작용을 한다.
자연은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사람이 손을 대면 탈이 나기 마련임을 귀농하고 알았다.
태풍권에 있는 상황에서 이리도 더울 수가 없다.
진땀이 삐질 삐질 나고 목이 마르다.
물이 떨어지니 물도 그립다.
초보농사꾼이 빗물을 끓여 먹잔다.
끓이면 더 나은건지 알 수 없다.
귀농을 하고 배우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조를 짰다.
선우와 내가 한 조,
주현이와 초보농사꾼이 한 조다.
교대로 보초를 서기로 합의.
그 보초라는 것이 그렇다.
인간이 자연의 행동에 제재를 가할 수 있는지.
자연이 하는대로 지켜볼 뿐이다.
그러고보니 보초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지켜보는 일이니까.
지금 생각하니 인간은 자연의 일부도 아닌, 한 조각일 뿐이다.
그의 행동에 어떤 영향도 못미치니 말이다.
그러면서도 자연을 보호한다느니, 자연을 개발한다느니,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니 하며 잘난척을 해댄다.
아마도 그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리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지금은 12시 40분이다.
간간이 마루에 나갔다 바람을 맞고 들어와 몇 자 적기를 계속한다.
제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있는 일이 완전 인내력 테스트다.
빗물로 세수를 하고 왔다.
두릅에 진물이 나듯 몸에 난 초조의 진물을 닦아내고 오니 한결 몸이 가뿐하다.
손전등으로 논을 비추어본다.
단번에 들어오지 않으니 마루를 이리 저리 오가며 비추어본다.
전봇대가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냇물과 싸우는 전봇대가 기특하다.
또 함석소리가 요란해진다.
조금 화가 풀리더니만 또 삿대질까지 해댄다.
이리 오두막의 밤은 깊어갈 것이다.
과연 내일 아침에 일어나 산골아이들과 초보농사꾼의 얼굴을 서로 볼 수 있을지.
깊어가는 밤의 깊이만큼 산사태의 불안도 깊어만 간다.
귀농 산골가족 부디 안전하길......
2002년 8월 마지막 날이 지나고 9월의 첫날을 맞이하며
(사진은 태풍이 휩쓸고 난 다음 날의 풍경입니다.)
산골 오두막에서 배동분 소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