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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동분 소피아 Jan 31. 2018

그 사람을가졌는가.

귀농아낙의 산골살이

다른 떡과는 달리 가래떡은 태어나자마자 물 속으로 들어간다.
바깥 세상이 녹녹치 않으니 찬물에 정신 차리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뜻일까.
모든 떡의 기본은 가래떡이라고 난 생각한다.
어떤 고명으로도 치장하려 하거나 양꼬 등으로 맛을 홀리게 하지 않고 순수 자체로 맛을 내는 가래떡이 기본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렇게 태어나자마자 물 속으로 들어가 수행하고 나오는 떡으로는 가래떡이 유일하니까 더더욱 그렇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누군 절편이 기본이 아니겠냐고 하지만 거기에는 아주 약간의 멋을 가미했다고 볼 수 있다.

그저 요즘 애들이 끌고 다니는, 고시원생의 필수품인 삼색 슬리퍼 무늬 정도를 추가하여 가래떡과 약간의 차별화라도 꾀한 것이 절편이지 싶다.

그래서 어찌 보면 가장 순수함이 묻어나는 떡이 가래떡과 절편이 아닐런지.
예전에는 떡 속에 꿀이 흐르고, 앙꼬가 빵빵하게 들어있는 떡을 좋아했다.
입으로 투척되면 바로 혀가 자지러지는 그런 떡을...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절편이 좋다.
씹을수록 담백한 맛이 사람을 질리지 않게 한다.
사람도 그렇지 싶다.

겉이 화려하고, 모든 사람을 다 품을듯해 보여도 막상 조금의 이해관계가 끼어들면 바로 떡맛 떨어지게 하는 사람...
그러나 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그 날이 그 날같은 사람은 절편처럼 오래 묵을수록 깊어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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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방에 불을 들이는 일은 구들놓인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목구멍으로 꿀을 넘기듯 술술 불이 지펴지는경우가 있고,  내가 아는 육두문자란 문자는 다 쏟아내고, 눈물, 콧물까지 다 빼고도 불이 지펴지지 않아 애먼 부지깽이를 내던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구들방이라고 해서 나무넣고 성냥불만 그어대면 활활 나무에 불이 붙어 아랫목이 절절 끓는 것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구들방은 날씨와 영향도 받아 바람이 어떻게 들이치느냐에 따라 아궁이 속으로 불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춘기 아이들 반항처럼 아궁이 밖으로 불이 기어나오는 경우도 있으니 여간 예민한 사항이 아니다.

귀농했을 때 살던 오두막에는 구들방이 있었는데 새로 지은 집에는 구들방은 없다.
처음에 이 집을 지을 때 구들방을 하나 만들기로 작정을 했었다. 안방에...
그러나 건축업자 말이 연기 운운도 하면서 권하지 않았다.
정말 연기 때문에 그랬는지, 아니면 구들방을 들이려면 손이 많이 가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을 믿는 편이라 그때는 건축업자의 말에 고개를 있는대로 끄덕이며 그러시라고 하는 통에 구들방이 물건너갔다.

지금  생각하면 혹여 연기를 감수하고라도 들일 것을 하고 들입다 후회하고 있다.
귀농 막 해서부터 약8년 동안은 구들방 하나를 예찬하며 떠받들고 살았다.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아 골동품 점에 가서 ‘풍로’라는 옛 물건을 사서 돌려가며 불을 피우곤 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풍로를 돌려가며 구들방에 불을 피우는 모습은 내가 봐도 멋졌었다.
개고생은 하지만 일단 불이 붙으면 방은 끝내줬다.
하이갸 말이 방이지 코딱지 만하니 금방 따뜻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우린 귀농했을 때 살았던 오두막에 방이 3개였는데 유독  4식구가 그 접은 구들방에 모두 맞춰 들어가 잤다.
이제 새 집을 짓고 천장까지 높은 집을 짓다보니 구들방처럼 그런 고풍스러운 영화를 누리지는 못한다.
나무보일러의 아궁이로 연신 나무를 우겨 넣고 ‘니가 안따뜻하고 배기나 보자’며 내 머리통 두 배만한 두께의 나무를 가뜩 밀어넣어도 방은 안따뜻하고 배겼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안따뜻한 게 아니라 얻어먹은 나무 대비 내놓은 화력이 그에 못미친다는 얘기다. 

인풋, 아웃풋에 도끼눈 뜨고 칼같이 눈금세는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껄적지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벽난로였다.
바닥은 몇 년째 쓰고 있는 나무보일러가 담당하고, 공기의 따뜻함은 벽난로가 담당하게 하기 위해 벽난로를 큰 맘 먹고 들였던 것..

이제는 두 담당자의 비위를 잘 맞춰가며 쓰다보니 겨울을 그럭저럭 잘 나고 있다.
이거 서론이 너무 길다.
이것도 나이먹는 티를 내는갑다.

어쨌거나 산골에서 나무는 쌀과 함께 으뜸가는 생필품이다.
그런 나무가 겨울을 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초보농사꾼이 중간중간 나무를 해오긴 했지만 나무를 베어오는 게 아니라 우리 산에 눈을 맞고 쓰러진 것을 산 위에서부터 끌고 내려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나무도 늘 널려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늘 나무는 역부족이었다.
그 사이 쥐똥만큼 남은 나무도 야금야금 사라져 갔다.

그렇다면 나무를 사는 일은 쉬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나무를 사기 위해 미리 이웃 동네 형에게 부탁을 해놓았다.
그 형이 나무 장사를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나무를 파는 사람들과 잘 알기에 형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소식이 없었다.
초보농사꾼이 눈길을 헤치고 형에게 쫓아가 몇 번 확인을 하고 부탁도 했지만 지금 나무사려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아마 형이 아무리  부탁을 해도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수요가 많으면 뭐든 절절 매야 하는 건 나무거래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집 나무가 간당간당함을 잘 아는 형도 발을 구르기는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눈이 왕창 왕창 쏟아지며 겁을 주었다.
더 쌓이면 일이 더 어려워진다.

눈이 쌓여 이 해발 높은 산골로 오는 길이 얼면 나무싣은 큰 차가 올라오지 못하기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눈이 쌓이기만 하고 녹지 않는 시절이다. 내 욕심처럼...

길이 미끄러운 데다가 이 마을에서 저 마을 거리도 얼마 안되는데 우리집이 조금 멀다고 나무값에 10만원을 더 달라고 하여 그런다고 했다.

그나마 눈까지 와서 조금이라도 미끄러우면 그도 저도 물건너 가게 생겼다.

다시 눈이 한 번 폭삭 오고는 나무를 실은 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무가 똑 떨어진 것은 아니나 멱이 찰 정도였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TV마다 떠들어대던 날 아침, 이웃 마을 형에게로부터 전화가 왔단다.
지금 차가지고 집 근처로 갈테니 어디로 나오라고...
어디가서 조금이라도 나무를 하러 같이 산에 가자고 했단다.

눈이 그리 쌓이고 날씨가 주식시세만큼 곤두박질 친 날인데 우리 나무가 걱정이 되어 나무하러 가자고 한 것이다.
초보농사꾼이 눈도 많이 왔고 날이 추운데 무슨 나무냐고 했는데도 형은 우리가 나무가 떨어져 추위에 떨까봐 걱정이 되었던 거였다.

초보농사꾼이 간신히 형의 그 눈물겨운 의지를 주저 앉히고 전화를 끊은 다음 내게 그 사연을 전하며 먼 산을 본다.
과연 우리의 땔감까지 걱정되어 눈길을 헤치고 나무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걱정이야 입가진 사람마다 해줄 순 있지만 눈쌓인 산을 같이 헤맬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초보농사꾼은 그 말을 여러 차례 하며 형의 고마움을 되새겼다.
그랬다.
초보농사꾼이 형네 집에 가면 우선 밥상 먼저 차려주며 꼭 밥을 먹여 보냈다.

초보농사꾼이 잘 먹는 반찬을 봐두었다 꼭 싸주고, 따로 만들어 보내고 하는 사람이다.
표현은 안했어도 우리 땔감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눈쌓인 산으로 나무하러 가자고 할 정도로...

결국 형의 그 의지를 초보농사꾼이 말렸지만 마음은 벌써 집 뒤에 나무를 넉넉히 쌓아두고도 남을 그런 훈훈함을 받았다.

‘그래, 우리 주위에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많으니 분명 우린 행운아야.’
이런 인연으로 인해 누군가 주는 상처와 실망감으로 세상이 더럽다가도 수정처럼 맑음을 느끼며 살아가는 거라고, 그렇게 해서 세상은 또 구리스를 칠한 듯 미끄럽게 굴러가는 거라고...

그리고 며칠 후 우리가 사기로 한 나무가 한 차 왔다.
12톤에서 13톤 정도의 분량이란다.
이제 야콘즙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나무를 잘라 나무노적가리를 만들어야 한다.
쌓인 나무를 보니 배가 부르다.
이 나무가 산골로 오기까지 형의 도움이 컸겠지.

초보농사꾼이 나무를 자른다.
길다란 나무가 토막토막 날 때마다 우린 또 한번 형이 눈속으로 나무하러 가잔 말을 떠올려 본다.


이제 곧 나뭇벼늘이 그득 쌓일 거고 우린 한시름 놓고 다시 야콘즙 작업을 하며 겨울의 긴 터널을 따뜻하게 지날 것이다.

법정 스님이 쓴  <오두막 편지>의 한 대목이 생각난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開眼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그런 만남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끝없이 가꾸고 다스려야 한다.”

진정한 만남을 위해 난 얼마나 내 영혼을 갈고 닦고 조이고 기름치고 있는지....

산골 다락방에서 배동분 소피아

(2013년 1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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