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 요정의 선물』- 신선미 그림책
옛 앨범을 꺼내어 보던 엄마가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할머니는 그 시절 일하러 가느라 바빠서 매일 울던 엄마를 꼭 안아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셨다고 합니다.
아이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개미요정들에게 말하게 됩니다.
개미요정은 엄마와 할머니에게 그리운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투명장옷을 선물해주고 둘은 엄마가 아이였던 시절로 돌아가 아쉬웠던 마음을 달랬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투명장옷을 입은 두 모녀를 보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요즘 마음이 이상하다는 첫째를 신경 쓰고 있던 찰나였는데,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나의 어릴 적이 떠올랐다.
엄마가 전업주부로 계실 적에는 솥으로 맛있는 빵도 만들어주고, 시장에 쌀을 가져다 뻥튀기 아저씨에게 튀밥을 만들어오면 그걸 엿에 버무려 맛난 간식도 만들어 줬는데... 그때의 집은 늘 상쾌하고 화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면, 엄마가 아빠 사업을 도우러 함께 나가시고 나서부터 집은 늘 어둡고 쓸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출퇴근할 때 운전을 해야 한다며 면허시험을 준비하던 엄마가 생각난다.
오랜만에 시험공부를 하며, 국가고시를 본다고 몇 날 며칠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필기시험을 준비하더니 만점으로 통과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면허를 따셨고, 매일 막히던 성산대교를 차로 출퇴근을 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가 없는 집은 쓸쓸했다. 엄마가 놓아둔 용돈을 챙겨 들고 간식을 사 먹으며 동생과 엄마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뭐하고 놀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아마 비디오 대여점에 가서 만화영화를 빌려다 보는 게 유일한 재미였을 것 같다.
엄마 대신 집안일을 돕지는 않았다. 엄마가 설거지도 좀 해놓고 빨래도 걷어서 개 놓으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한 번을 제대로 한 적이 없어서 엄마가 돌아오면 폭풍 잔소리와 신세한탄을 하셨던 것 같다.
아빠도 본인 물 한잔 손으로 안 떠 드시던 때라 엄마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을 것 같다. 그러다 한 번씩 엄마가 병이 나면 온 가족이 쫄쫄 굶어야 할 정도로 아무도 아무것도 못하던 우리였다.
가끔 어릴 때 맡았던 엄마 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엄마가 귀지 파준다고 무릎 베고 누워보라고 했을 때 맡았던 엄마 살 냄새, 옷 냄새다.
몇 년 전 생각지도 못한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고 너무 놀라 병원에서 나와 엄마에게 달려가서 펑펑 울었었다. 일하다 말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온 딸이 울자 엄마는 당황해하면서도 꼭 안아주며 달래주셨다. 그때 안긴 엄마는 어릴 적 내 기억 속 엄마보다 너무 작아서 더 슬펐다. 하지만 엄마는 더 큰 사랑과 따뜻함으로 나를 감싸주고 달래주었다. 그게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는 엄마의 힘인 것 같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누구를 만나고 싶을까?
지금은 너무 잊고 지네 가물거리던 옛 기억을 더듬어본다. 흐릿하던 기억들이 사진으로 남아 순간순간 장면으로 떠오른다. 엄마품에 안겨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 여의도 공원에서 올림픽 기념 전시를 한다고 가서 찍은 사진, 아빠가 새로 카메라를 사셨다고 기념으로 집에서 찍은 사진, 초등학교 졸업식 날 곧 학교 간다고 찱흙 놀이하던 손으로 공부하는 척 아이템플 풀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아빠가 늘 말씀하시던 곱고 귀하게 키웠다던 예쁜 공주님의 기억들이다.
그때로 돌아가면 나는 부모님께 무슨 말을 할까? 엄마 일 안 하게 아빠 사업하지 마시라고 힘들어도 회사 그냥 참고 다니시라고 할 것 같다. 내가 그 말을 하면 달라지기는 할까? 그럼 엄마는 일 안 하고 우리를 더 살뜰히 보살펴 주셨을까? 그럼 동생도 방황하지 않고, 나도 공부를 더 잘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내가 다쳤던 고등학교 1학년 체육시간으로 거슬러 가야겠다.
끝까지 무서워서 못하겠다고 뜀틀 구르기를 하지 말걸 그랬다. 겁먹고 뛰었다가 그대로 허리부터 떨어져 한 달간 병원신세를 졌었다. 학교도 못 가고 가만히 천장만 보고 누워 이러다 일 년 유급되는 거냐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부모님은 교과서라도 보라고 하셨지만 책이 들어 올리도 없었고, 읽으라고 가져다준 삼국지는 수면제 역할을 해서 하루 종일 자고, 또 자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그러다 도저히 못 있겠다며 사정사정해서 갑옷 같은 보호대를 입고 등교를 했을 때, 친구들과 관계를 다시 맺는 것도 어려웠지만, 공부를 따라잡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시력도 떨어져서 안경을 맞춰야 했고, 첫 중간고사에서 처음으로 반 꼴찌를 전교에서는 뒤에서 2등을 했었다. 담임선생님이 사정이 있으니 봐준다고 하셨지만, 너무 충격이었고, 기말고사에도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헤매고 다니다 2학년이 되어 운이 좋았던 건지, 하늘이 기회를 주신 건지 내 짝꿍은 반장, 앞에 앉은 친구는 부반장, 앞에 앉은 친구의 짝꿍은 우리 반 4등이었다. 그 친구들과 단짝이 되어 나는 곁눈질로 공부하는 법을 배우고, 모르는 것은 물어보고 그렇게 격차를 좁혀갔던 것 같다. 수능만 아니라면 고2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항상 말했었는데, 잊고 있었다. 그때 정말 즐거웠는데...
그때의 친구들은 꾸준히 관계가 이어져 왔는데 각자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서서히 연락이 뜸해졌다. 각자 사는 지역도 다르니 한번 시간 내기가 어렵다. 지금은 얼굴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연락을 하는데 다시 얼굴 보면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반가워서 서로 부둥켜안고 울 것 같다. 각자의 결혼식에서 눈물 흘릴 정도로 애틋하던 우리들이었으니까, 코로나 안정되면 만나야지. 보고 싶은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