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a p Dec 29. 2020

[에세이] 나무

 병원 앞에는 큰 나무가 한그루 있다. 내 팔로 한 아름 안아 봐도 다 둘러지지 않는 아주 큰 나무. 족히 이백 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는 그곳에서 내가 본 적이 없는 시대의 사람들도 만나보고 있었을 것이다. 나 또한 나무에게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환자복을 입은 채 나무 옆에서 책을 읽기도 했고,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거의 말없는 대화가 대부분이었지만 때로는 나무를 안아주면서 이런저런 나의 이야기들을 직접 들려주기도 했다. 무료한 병원의 일상 속에서 나무는 내 친구이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퇴원을 한 뒤에도, 나는 가끔 나무를 찾아갔다. 일부러 찾아간 적은 없었다. 단지 그 근처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나무에게도 인사를 전하는 정도였다.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때로는 나와 나무가 함께 기대 있던 그 벤치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기도 했다. 나는 말없이 건너편의 벤치에서 기다렸다가 그 사람들이 떠난 후 나무 곁으로 자리를 옮겼었다. 가끔은 남자 친구와 함께였다. 한 해가 지나 남자 친구가 바뀌었다. 두 해가 지나 또 남자 친구가 바뀌었다. 언제나 나무가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없었다. 나무에게 그들을 소개할 때마다 나무는 그저 묵묵히 우리의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무는 나의 만남과 헤어짐을 모두 바라보았다. 나무는 사시사철 큰 몸뚱이를 우람하게 자랑하며 그 자리에 푸르게 푸르게 있었다.


 내가 17살 때 처음 보았던 나무는 어느새 성년이 된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나무의 가슴에는 나의 흘러온 이야기들이 하나하나 새겨있다. 나무는 그곳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새기고 있다. 나무는 큰 책이 되어 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품는다. 그 책은 누구나가 펼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오로지 나와 나무만이 꺼낼 수 있는 페이지가 있다. 다른 이들은 나의 페이지를 꺼내보지 못한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무는 언제나 비밀을 지켰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서울대 병원의 그 나무. 본의 아니게 도촬된 분께는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작가의 이전글 [에세이] 집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