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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Sep 16. 2020

쉬운 서양 철학 20

클레 VS 로스코

클레는 예술이란 창조활동이라 말한다. 예술은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재현할 것이라면 사진을 찍고 말지 예술 작품으로 소통할 이유가 없다. 당연히 제대로 창조된 예술작품은 난해할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세계에 타성적으로 적응한 사람일수록 그 난해함은 가중될 것이다.

기호처럼 느껴지지만 아직 가시적이지 않은 것이 있다. 이것을 가시화하려고 할 때, 그러니까 자신의 동요나 감정을 표현하려고 할 때, 클레는 그것을 선을 사용해 표현했다. 색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클레가 일차적으로 고민했던 것은 선이었다. 인상주의가 색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보이지만 클레의 표현주의는 데생, 즉 선의 추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클래의 선은 지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인 효과를 낳도록 고안된 것이다. 선의 굵기와 모양 그리고 위치 등등은 우리에게 강한 감정적 효과를 남긴다는 것을 클레는 잘 알았던 것이다.

클레는 "회화 작품이 더 순수할수록 -데생을 기초하는 형식적인 요소가 더 강조될수록-가시적 대상에 대한 사실주의적 재현은 더 부적절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재현이 부적절하게 되어야 그림은 화가의 내면과 역사, 혹은 감정적 요소를 유효하게 전달할 수 있다. 선으로만 이루어진 클레의 데생 그림만으로도, 혹은 세잔의 방식으로 색을 대조해서 만든 색채 그림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감정적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클레를 유럽 표현주의의 최상급 화가로 만든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로스코는 자신을 표현하려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 아니라 타인과 소통하려고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그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그림들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가령 보색 관계에 있는 색들이 연결되어 있다면 윤곽선은 더욱 짙을 것이고, 반대로 연접해있는 색들이 맞닿아 있다면 윤곽선은 상대적으로 흐릿할 것이다. 그러나 아예 윤곽선 자체를 부정하고 색만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움직임이 생기게 된다. 특히나 이런 경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발달한다. 바로 추상표현주의의 등장이다.

로스코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사람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반유대주의의 광풍을 온몸으로 맞았던 사람 아닌가. 사람들이 바뀌어야 하고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공멸하고 말 것이다. 불행히도 고압적인 강요나 지적인 설득 만으로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바뀌지는 않는다. 사람들의 경직된 감성을 활성화해야만 한다.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관객들의 감성을 활성화할 수 있을까? 일상적 의미에서 윤곽선은 사물을 식별하게 만드는 지적인 요소이고 색은 감성적 요소이다. 인간의 감정들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윤곽선의 요소를 제거해야만 한다. 그러나 색들이 대조되는 경우 저절로 드러나는 윤곽선을 어떻게 없앤다는 말인가.

여기서 로스코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색들이 더 강하게 대조될수록 윤곽선은 더 검고 짙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윤곽선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밝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태양을 보다 눈이 부신 사람들처럼 관객들은 색으로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 색과 색 사이의 윤곽선이 무너져야 색들은 감정을 전달하는 힘을 갖게 될 것이고, 화가와 그림 사이의 윤곽선이 사라져야 화가의 손은 그림의 색과 하나가 될 것이고, 그림과 관객 사이의 윤곽선이 무너져야 관객은 색에 젖어 화가가 전하려는 감정에 공명하게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화가는 화가이고 관객은 관객이라는 원리가 붕괴되고 공명이 발생하는 순간 화가, 그림, 그리고 관객은 하나의 감정으로 묶이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인간을 갈라놓는 인종주의, 인간을 구획 짓는 전체주의, 그리고 인간을 경쟁시키는 자본주의마저 녹아버리게 될 것이다.

클레와 로스코 둘 중 누가 더 우월한가? 이런 질문은 사실 전혀 무의미한 것이다. 오히려 어떤 작가의 그림이 우리에게 느낌의 영역을 열어놓는지가 더 중요할 것이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

우리가 앞서 함께 공부했던 벤야민을 기억할 것이다. 벤야민이 나치의 위협에 죽임을 당할 처지에 그를 끝까지 지켜주었던 천사가 바로 클레의 천사였던 것이다. 미국으로의 망명이 무국적자라며 거절되자 그는 자살을 택했는데 그때의 유품이 바로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였다. 지상에 머물고 싶지만 폭풍우 때문에 머물 수 없는 천사의 신세나, 사람들 편에 있어야 하지만 도주자 신세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처지나 애처롭기는 마찬가지다. 클레 역시 새로운 것을 창조해서 자신만의 것을 만들려고 했기 때문에 나치 정권에 퇴폐 화가로 찍혔다고 한다. 나는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무슨 어린애가 장난쳐놓은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 보니 우리 세계가 보지 못하도록 은폐한 세계에는 클레가 가슴으로 느낀 천사가 있을 것도 같았다. 미술교사셨던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이런 분들은 세밀화를 못 그려서 안 그리는 게 아니라 세밀화 같은 기본 미술은 이미 통달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고.


로스코 샤프란


이 그림은 로스코의 전성기 그림인 샤프란이다. 오렌지색 덩어리들이 윤곽선을 만드는 순간, 그 선에서 작열하는 빛은 디오니소스적인(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효과를 만든다. 윤곽선의 자리에서 윤곽선이 발생하는 걸 막으려는 로스코의 시도가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로스코의 그림 속 색 덩어리들은 둥둥 떠다니며 마침내 관객들의 마음에 깃드는 것이다. 그 색들이 슬픔의 색이면 관객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환희의 색이라면 관객들은 희열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참고 서적: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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