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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Sep 17. 2020

쉬운 서양 철학 21

데리다 VS 들뢰즈

데리다는 <<목소리와 현상>>에서 '의식이란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의식 주체는 자신의 독백을 듣는 고독한 주체라는 것이다. 바로 데리다는 이런 고독한 주체의 순수성을 해체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속으로 "나는 살아있다"라고 독백했다고 하자. 이런 독백은 죽음의 위협에서 다행스럽게 살아났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죽는 상황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내가 살아있다는 표현조차 사용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음성 중심 주의나 순수한 주체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나는 살아있다"라는 표현이 죽음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들은 이 말 자체가 자신이 살아있음을 표현하는 순수한 음성 표현이라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당혹스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어 애인이 전화로 "나는 살아있어!"라고 다급하게 말할 때 우리는 대부분이 "무슨 일 있었니? 혹시 다친 것은 아니야?"라고 되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이 동일한 맥락에서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이나 삶에 대해 발언할 수 없을 것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밤과 낮, 아래와 위, 안과 바깥 등이 대립되면서 서로 의존하고 있는 차이의 체계가 우리의 의식이나 현재적 발언까지 지배하고 있다. 사실 순수한 음성만으로 우리가 모든 상황을 순수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아무리 순수해 보이는 음성언어 혹은 순수의식도 차이의 체계, 즉 일정한 텍스트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국어를 배운 사람이 외국에 나가 살게 되었다고 하자. 당연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그는 자신이 배웠던 모국어로 엄청난 생각과 반성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어떤가? 인간의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천국의 언어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천국에서 배운 언어든 모국에서 배운 언어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어를 떠나서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데리다의 말대로 우리는 "텍스트를 넘어설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데리다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추상적 사태가 아니라 언어와 생각이 서로 얽혀 들어가는 구체적인 우리 인간의 삶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적 삶이 있은 다음에 생각이나 언어를 추상화할 수 있지 그 역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음성이나 소리의 세계에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층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는 들리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환원하지 않고 들리는 세계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바로 이러한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했던 사람이 들뢰즈였다. 들뢰즈는 음과 색채를 비교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여기서는 그의 유명한 개념 '탈 영토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탈 영토화는 고정된 지역을 벗어난다는 의미로써,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가치와 의미를 떠나는 운동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제 들뢰즈가 색채와 음을 탈 영토화라는 개념으로 구별하려고 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모나리자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색깔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 탈 영토화 되는 순간 이 그림 안에서 거대한 색들의 용해 현상이 일어날 것이고, 우리는 더 이상 모나리자를 현실적으로 식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달리 소리의 경우는 어떤가? 가사를 가진 대중음악을 가사가 없는 음악으로, 나아가 더 추상적인 음악으로 탈 영토화 시켜 보도록 하자. 이 경우 우리는 더 세련되고 자율적인 것으로 들리는 음악, 혹은 더 순수한 추상 음악을 얻게 될 것이다.

색깔이 우리의 현실성에 부합한다면, 음악은 우리의 잠재성을 자극한다. 그림을 보고서 우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음악을 듣고서 격한 감정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 것은 모두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시각적 자극은 우리 실존의 표면만 건드릴뿐이고 불쾌하면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들뢰즈의 말대로 국기라는 시각적 대상도 비장한 트럼펫 연주가 없으면 애국심을 촉발시키지 못하고, 화려한 쇼의 레이저 광선도 음악을 수반하지 않으면 공허한 불빛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사실 공포영화를 볼 때 공포감을 조성하는 음악을 뺀다면, 우리는 그 영화에서 별다른 공포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데리다는 직접적인 내면의 소리 그리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의식이라는 착각은 음성 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체하면서 텍스트의 우선성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할 때 텍스트로 생각하는가? 생각은 생각이지 그게 한국어인지 영어인지 텍스트로 변환해서 생각하는 걸까?

내 딸아이가 두 살 때 그러니까 걸음마는 하는데 아직 쪽쪽이를 물고 옹알이를 할 때, 아이의 할머니(나에겐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갔다가 거리에서 하는 공연을 보게 되었다. 한 팀의 공연이 끝나고 가려하는데 어떤 아저씨가 "가지 마세요 다음번이 제 공연인데." 하자 낯가림이 심한 우리 아이가 그 공연장을 떠나지 않고 머물렀다. 아저씨가 "이번 연주는 너를 위해 하마."라고 하는데 아이는 알아듣는 듯 아저씨를 응시했다. 공연이 끝나고 아저씨가 다가오자 낯가림이 그렇게 심했던 딸은 아저씨와 악수를 했다고 한다. 말은 못 알아들어도 음악으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목격한 신비한 경험이었다고 엄마는 아직도 말씀하신다.


자크 데리다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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