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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Sep 19. 2020

쉬운 서양 철학 23

메를로-퐁티 VS 리오타르

의식의 순수성이나 절대성을 부정하면서 신체의 중요성을 부각했던 현대 프랑스 철학자가 바로 메를로-퐁티다. 서양을 지배했던 해묵은 편견, 그러니까 신체나 육체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영혼, 혹은 기독교에서 말한 사후에 불멸하는 영혼이란 메를로-퐁티에게서는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각의 현상학>>에서도 이미 메를로-퐁티는 말했다. 나의 의식이란 "나는 그걸 생각하고 있다."라는 내면적 성찰보다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있다."라는 육체적인 경험과 관련된다고 말이다.

그런 그가 영화를 보고서 얼마나 흥분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영화란 남자의 , 여자의 , 개의 , 고양이의 , 건물의  등등이 마주치고 교차하는 장소, 혹은 운동하는 몸들의 경연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몸의 철학이 그대로 구현되는 극적인 장면을 영화에서 목도했던 것이다. 등장인물의 행동을 직접   없는 소설에서는 등장인물의 내면 묘사가 무척 중요할  있다.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행동을 너무 쉽게 보여줄  있지 않은가. 이것이 영화라는 매체의 힘이 아닌가. 소설은 인간의 사유, 혹은 내면을 제시해 주는데 탁월하다. 이와 달리 영화는 우리에게 인간의 행위와 행동, 한마디로 몸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우월한 매체다. 수영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을 보는 것보다는 동네 형이 수영하는  보는   효과적일 것이다.

몸의 움직임으로 실현되는 타인의 행동과 행위는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사물과 타인을 다루는 특별한 방식을 우리에게 직접 제공한다.” 돌아보라. 키스 장면을 다루는 소설 천권보다는 키스 장면을 보여주는 영화  편이  도움이 되는 법이다. 키스만 그런가. 자동차 핸들을 잡는 방법, 파업을 하는 방법, 사람을 죽이는 방법, 혁명을 하는 방법, 춤을 추는 방법 등등. 영화는 이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혁명가의 내면은 어떠한지, 춤을 추는 사람의 희열은 무엇인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때의 슬픔은 무엇인지 등등,  정신과 영혼마저 덤으로 가르쳐주게  것이다. 어쩌면 살아가는 방법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배우려면, 책일랑 던져버리고 영화관에 가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메를로-퐁티가 영화를 예찬했던  바로  때문이었다.

우리 시대 체제의 내적 논리에는 자본의 맹목적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영화는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행동을 가르칠 수도 있고 아니면 그에 저항하는 행동, 다시 말해 자본주의 논리와는 무관한 행동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리오타르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속칭 할리우드나 영화제 수상작으로 대변되는 주류 영화와  반대로 체제의 흐름을 교란시키는 비주류 영화를 구분할  있다. 리오타르는 전자를 ‘영화 후자를 ‘반영화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리오타르가 정치적 신념에 입각해서 반영화를 옹호하고 있다고 속단해서는  된다. 영화에 대한 리오타르의 입장은 반영화가 일깨우는 감정이 인간 개개인의 진정한 희열에  가깝다는 그의 통찰에 근거하니까 말이다.

수단과 목적으로 나뉜 노동의 세계,  자본의 세계에서는 현재 주어진 계기는 단지 수단으로 보이기 때문에  자체로 향유의 대상이 되어서는  된다. 그러니까 다람쥐 쳇바퀴처럼 수단과 목적의 회로에 갇힌 순간, 우리에게 행복은 항상 연기될 수밖에 없다. 반면 수단과 목적의 회로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가  순간 만나는 것들은 모두 놀이와 향유의 계기가 된다. 반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노동의 세계, 자본의 세계, 생산적 차이의 세계에 억압된  내밀한 희열의 순간을 복원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미 자본의 세계에 거의 완전히 훈육된 어른들에게 리오타르나 영화 예술가가 꿈꾸는 반영화는 난해한 예술 영화로 보일지도 모른다.

리오타르의 말처럼 주류 영화는 “비정상적인 움직임, 헛된 방출, 순전한 소비자를 위한 차이 등을 제거함으로써....... 자기가 운반하는 것을 상실하지 않고 전달하려고한다. 아예 노골적으로 아이들의 성냥 놀이와 같은 숏은 철저히 배제하고 커피물을 끓이려고 켜진 어른들의 성냥과 같은 숏만을 나열할  있다.(어른들의 성냥은 커피물을 끓이기 위한 도구, 수단과 목적의 분리  노동이지만 아이들의 성냥은 놀이, 그냥 순수하게 수단과 목적의 일치이다.) 아무리 저항해도 노동의 세계에도 잃어버린 놀이에 대한 향수가 녹아 있는 것은 아닌가. 간혹 반영화가 아니라 주류 영화를 보러 갔을  영화 전체가 아니라  장면만 기억나는 경우가 있다. 주류 영화에 포획된 반영화적요소  순수한 희열의 세계에 노출된 탓이다.

책과 영화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책을 선택하겠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어떤 것을 묘사하려고 한다면 책은 상상하게 한다. 어떤 초등학교에서 실험을 했는데 동화를 어떤 아이들은 책으로 어떤 아이들은 만화영화로 보여준 다음 생각나는 것을 그리게 했다.  결과 책을 읽은 아이들은 상상해서 그렸고 만화영화를  아이들은 만화를 그대로 그렸다고 한다. 간혹 체제의 전복이나 어떤 것을 알려주려고  때는 벤야민이나 메를로-퐁티처럼 영화를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간혹 기욤 뮈소 같은 소설가들은 미리 영화화나 드라마화할 것을 생각해 글을 쓰기도 한다.(작가 본인은 아니라고 했으니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면 받아들일 때도 거북함이 있다. 일례로 심형래 감독의 -워는 국뽕 영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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