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a p Sep 13. 2020

쉬운 서양 철학 17

베르그손 VS 레비나스

베르그손은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베르그손의 유명한 설탕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설탕물 한 잔을 마시고 싶을 때 내가 서둘러본들 소용이 없으며 설탕이 녹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 조그만 사실은 큰 교훈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물질계의 모든 역사에 걸쳐 적용되는 수학적 시간이 아니다.... (중략) 그 시간은 나의 조바심, 다시 말하면 마음대로 더 늘일 수도 없고 더 줄일 수도 없는, 나에게 속하는 지속의 어떤 부분과 합치되고 있다. 그것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것이다.  <<창조적 진화>>

베르그손의 논의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체험된 시간'과 '시계의 시간'이 갖는 차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 시간 동안 상영되는 두 가지 영화를 각각 따로 보게 되었다고 해보자. 하나는 너무 재미있어서 "어, 벌써 끝났네"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영화였다면, 다른 하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 계속 시계를 보면서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어"라고 말하게 만드는 지루한 영화였다. 베르그손은 바로 이 체험된 시간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시간이라 이야기했던 것이다. 이제 베르그손은 질적인 시간 혹은 체험된 시간에는 두 가지 지속이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내가 극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영화는 자기만의 지속을 드러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보는 순간, 영화의 지속과 나의 지속은 결합된다. 그래서 상영시간은 짧게 또는 길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라는 책의 제목처럼 베르그손은 모든 존재자들이 창조적으로 진화하는 역동적인 변화 과정 속에 있다고 말한다. 다른 존재자들과 마주치기에 인간 혹은 인간의 지속은 미래를 향해 창조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설탕이 녹기를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인간이 미래로 지향된 존재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간단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베르그손은 의식의 본질적인 시간성은 현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에게 의식의 본질적인 기능은 "더 이상 없는 것을 붙잡는 것, 아직 오지 않는 것을 예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는 "당신의 정신이 언제나 향해있는 방향을 생각해보라"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기억이든 지각이든 모든 것은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염려와 기대"에 종속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진화란 미래로 나아가는 운동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말이다.

베르그손에서 샤르트르로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특징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간의 자유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마치 인간 주체를 미래에 대한 신적인 권능을 가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낙관은 너무 유아론적인 견해가 아닐까? 바로 이러한 의문을 던졌던 철학자가 바로 레비나스이다. 그는 우리의 기대 혹은 기루는 뜻하지 않은 타자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좌절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때 레비나스는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러시아 문학에 눈을 뜨면서 철학적 의문을 갖게 되었다.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에 편입될 것을 예감했던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어를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라는 작품을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세상에서 도피한 채 홀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유아론적 삶을 기술하면서 우리 삶에 미치는 타자의 효과를 탁월한 감각으로 묘사했다. 어린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통해 타자에 대한 감수성을 배웠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타자의 철학을 개진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그의 이해가 베르그손이나 샤르트르와 다르게 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마치 미개척지처럼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베르그손과 샤르트르의 생각과는 달리 레비나스는 단호히 미래는 "어떤 방식으로도 나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미래는 나의 내면으로 결코 환원할 수 없는 외제성을 가진 것이다. 이 때문에 기대나 예측에 의해 적중되는 미래란 진정한 미래가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미래로 투사된 현재라는 점에서 미래의 현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레비나스는 왜 미래가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았는지 분명히 밝히기 시작한다. 그것은 미래와의 관계가 타자와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타자와 마주치고 관계하면 우리는 자신의 미래 모습이 과거나 현재의 모습과는 다를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 때문에 레비나스는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홀로 있는 주체라는 사르트르의 관점과 순수한 개인적인 지속이라는 베르그손의 이야기가 공허한 이야기로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어떤 타자도 만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내일은 오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레비나스에게 타자란 새로운 삶, 새로운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축복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사실 타자가 나의 삶에 개입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동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샤르트르 본인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샤르트르에게 나의 자유와 갈등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존재는 축복보다는 재앙에 가까웠다. 샤르트르가 타자와의 마주침이 낳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주목하면서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옥이라도 타자와 마주쳤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모든 타자와의 마주침이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베르그손의 논의에서 나는 "기대하는 마음" 때문에 "미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지금은 이렇게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지만 미래에는 코로나도 나의 아픔도 모두 사라질 것을 기대하게 되었다.

레비나스의 논의에서 나는 타자와 마주치지 않고 골방에서 유아론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인터넷이라는 열린 공간을 통해 새로운 독자와 글로써 소통하고 있음을 알았다.


앙리 레비나스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이 자료는 저작권법과 지적재산권을 가지고 있으니 무단복제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쉬운 서양 철학 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