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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Sep 12. 2020

쉬운 서양 철학 16

아도르노 VS 아렌트

히틀러가 아우슈비츠에서 대량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나서 비극에서 살아남은 두 명의 철학자는 전체주의는 왜 발생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바로 아도르노와 아렌트다. 먼저 아도르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젊은 시절부터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아도르노에게 아우슈비츠는 벗어나기 힘든 트라우마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슈비츠라는 트라우마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는 끈덕지게 전체주의 문제를 숙고해야만 했다. 그 결과 그는 충격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우슈비츠를 낳은 것은 광기나 비정상이 아니고 지금까지 서양철학이 그토록 자랑하던 '이성' 혹은 '합리성'이었다.

개념으로 무언가를 포착하기 위해서 이성은 개체들이 가진 복잡성과 차이는 제거하고 획일화해야만 한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욕망에서 아도르노는 마침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견한다. 동일성에 대한 욕망은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이런 순수성을 더럽히는 차이로서 유대인과 집시들을 제거하려는 나치의 편집증적 욕망으로 실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다시 말해 헤겔이란 이성주의 철학자가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배척했던 것들을 아도르노는 철학적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아도르노가 언급한 '특수한 것'은 들뢰즈에 따르면 '단독적인 것'으로 번역될 수 있는, 그러니까 교환 불가능한 개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개체들 간의 대립과 차이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최종 목표는 개념을 통한 종합이었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종합이 아닌 모순의 원칙을 관철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정 변증법>>에서 그가 개념의 자기 동일성에 저항하는 이질적인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변증법이 '비동일성에 대한 일관된 의식'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다. 특수한 사람도 개별적인 사람도 종합될 필요 없이 자기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마찬가지로 아렌트의 평생 화두도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이었다. 1963년 출간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비로소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비밀을 풀기 위한 나름의 진지한 해법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아렌트가    <<뉴요커>>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을 참관하고 아이히만이라는 인물, 그리고 전체주의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더욱 심도 있게 해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아렌트의 글이 그녀의 동포, 즉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에게서 심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아이히만 이란 인물이 잔혹한 악마가 아니라 이웃의 빵집 아저씨처럼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눈에는 아이히만이란 인물은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근면한 관료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출세를 지향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근면을 생활의 준칙으로 삼은 인물이었다고 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자신에게 죄가 있다면 상부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것뿐이라고 수차례 강변했다.

아렌트라면 아이히만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철저한 무사유'역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철저한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히틀러에게서 받은 명령을 집행할 때 아이히만은  자신의 서명이 유대인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칠지 생각했어야 했다. 물론 아렌트의 유죄 평결을 아이히만이 듣고서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리 만무하다. "그는 말과 타자의 현존을 가로막는, 따라서 현실 자체를 막는 튼튼한 벽으로 에워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범죄를 숙고하면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사유와 달리 타자를 고려하는 인문학적 사유가 필요하다는 교훈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천부적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의무를 지키지 않을 때 언제든지 우리는 누구나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우리에게 악은 너무도 평범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아도르노의 말에서는 한 실험이 생각났다. 평범한 남, 여 그리고 엘리트,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있을 때 누구를 죽일 것이냐는 말에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장애인이나 노약자를 지목했다. 그들도 같은 인간이고 삶의 의지가 있을 텐데 말이다. 실제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매일 면도를 하고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다고 한다. 사회에 아직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어필했던 것이다. 장애인이나 노약자는 우리와 조금 다르고 쓸모없어 보여도 같은 인간이며 사회를 더럽히지 않는다. 그들을 제거하려 하기보다는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아렌트의 주장에서는 5.18의 계엄군이나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생각났다. 계엄군들은 거리에 사람이 보이기만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두들겨 죽였다. 신혼여행 가는 부부를 잡아서 신랑을 피투성이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에게 죄를 물으면 당시에는 진짜 빨갱인 줄 알았다고 한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역시 평범한 공무원이었으며 상부의 명령을 철저히 이행한 죄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았다. 아렌트의 말처럼 사유하기를 멈추는 순간 악이 닥쳐올 것이다.


아도르노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한나 아렌트 저 김선욱 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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