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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Sep 08. 2020

쉬운 서양 철학 12

러셀 VS 크립키

러셀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유명사들이 '기술어들에 대한 축약'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라는 고유명사는 '플라톤의 스승', '독약을 마신 사람', 혹은 '논리학자들이 죽는다는 예로 많이 제시하는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에 익혔던 학자가 떠오를 것이다. 바로 라이프니츠다. 러셀 본인은 <<라이프니츠 철학에 대한 비판적 해설>>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고유명사에 어떠한 외연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2,000여 년 전에 독약을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죽은 사람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러셀에 따르면 '박윤아'는 '레이싱 모델 출신 연구인'이거나 혹은  '철학과 나온 강사'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박윤아'라는 고유명사가 구체적인 어떤 것을 지시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어떤 사람이 박윤아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눈앞에서 어떤 개체를 '박윤아'라고 지목하지 못할 수도 있다. 특히 박윤아라고 불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면 말이다. 물론 박윤아라는 사람이 살아 있기에 현실에서 만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도 러셀은 박윤아라는 고유명사가 "이름이란 낱말의 고유한 의미에서 그 이름" 즉 진정한 고유명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결국 러셀은 고유명사에는 외연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하게 된다.

크립키는 고유명사가  일련의 기술 구들의 축약에 불과하다는 러셀의 입장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철학자였다. 크립키는 러셀의 기술 이론이 기본적으로 사후적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미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박윤아'라는 이름을 먼저 붙인다. 물론 박윤아라는 이름을 부여한 사람들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의 부모님이나 가족들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나서 '레이싱 모델을 했고 교육학 연구를 했다.' 러셀은 이런 전후 과정을 사후적으로 추론하여 '박윤아'라는 고유명사는 '레이싱 모델 출신 연구자'나 '철학과 나온 강사'라는 기술 어구들의 축약어라고 주장했지만 크립키는 이름 즉 고유명사가 부여되는 그 처음 순간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부르는 쓰임이 얼마나 독특한지 생각해 보라!"

크립키가 주목하는 "최초의 명명 의식"은 그가 고유명사를 사전적인 입장에서 성찰하려고 했던 점을 잘 보여준다. 크립키는 특정 고유명사(ex:소크라테스)로 지시되는 사람이 죽더라도 그 고유명사가 이처럼 최초의 명명 의식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는 특정 고유명사를 마치 어떤 아이를 최초로 명명했던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사용해야 한다.

고유명사를 빼앗긴 다는 것, 그것은 개체로서의 존엄성을 부정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이, 아줌마, 거기서 뭐해요!" "거기 조센진!" 고유명사를 긍정한다는 것 그것은 개체가 교환 불가능하다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줌마이기 이전에 박윤아예요!" "나는 조선 사람이기 이전에 박윤아예요!" 고유명사를 앞세운 다는 것은 이런 당당함을 피력하는 것이다.

러셀의 입장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생각이 났다.

예솔아 할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대답하면
너 말고 네 아범
예솔아 아버지께서 부르셔
예 하고 달려가면
너 아니고 네 엄마
아버지를 어머니를
예솔아 하고 부르는 건
내 이름 어디에
엄마와 아빠가 들어 계시기
때문일 거야

예솔이라는 주어에 엄마 아빠의 딸이라는 술어가 함축되어 있던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예솔=엄마 아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이라는 공식이 확립된다.

크립키의 주장에서 나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별 하나에 추억(追憶)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 잠” “라이너 · 마리아 · 릴케” 이런 시인(詩人)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읍니다./ 별이 아슬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게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읍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우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게외다.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잃고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쓰고 부끄러워 흙으로 덮어버렸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모두 자신의 이름이 있는데 나는 없다. 내게는 이 시가 이런 식으로 다가왔다. 일반 명사로 자신의 고유명사를 빼앗긴, 혹은 감내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철학자 러셀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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