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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Dec 08. 2024

[철학] 윤석열과 한동훈

1972년에 작은   ,  <<정치적인 것의 개념>>출간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예외상태, 비상사태를 선언할  있는 최고 주권자의 정치권력을 긍정하고 독재를 긍정했던 정치철학자 슈미트가 우리 앞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독재를 긍정했던  작은 책자가 출간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책에서 그가 '정치적인 ' 범주적으로 독립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슈미트에 따르면 "종교적, 도덕적, 경제적, 인종적 또는 그 밖의 대립들"은 항상 '정치적인 것'으로 변질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심각해지면 적과 동지라는 정치적 대립으로 곧바로 격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슈미트는 예외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초법적인 독재자의 역량을 긍정하게 된다. 만약 다양한 계층들의 이해관계가 국가를 적과 동지라는 이분법으로 분열시킬 때, 독재자는 외부에 적을 설정하여 내부인 모두를 동지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 국가는 내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외부에 적을 설정하는 순간, 동시에 내부 분열이 순식간에 미봉된다는 점이다.


슈미트는 전체 인류를 포괄하는 세계국가라는 것은 결국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류가 동지가 된다면 이것은 ‘적과 동지’라는 범주의 폐기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것의 폐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적도 설정되지 않는다면 정치적인 것이 성립될 수 없고 어떤 국가도 존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세계를 하나의 동지로 이루어진 평화적 집단으로 만들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슈미트는 “정치적 세계란 다원체이지 단일체가 결코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두 차례에 걸쳐 발발했던 세계대전으로 세계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는 착각을 여지없이 공격하는 대목이다. 그는 국가란 어떤 식으로든지 서로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여 그것을 자신의 주요한 양분으로 삼아 존속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실 슈미트의 생각 이면에는 인간이란 존재가 끊임없이 적과 동지란 정치적 범주를 통해 편 가르기를 할 것이라는 비관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감벤은 슈미트가 설정했던 ‘적과 동지’라는 범주를 대체하는 새로운 범주를 제안하여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슈미트의 적과 동지라는 개념은 사람들 사이에서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아감벤이 제안한 정치적 범주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는 한 개체 사이에서 그어지는 범주, 혹은 개체를 분열시키는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폴리스라는 정치 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조에’라고 불렀고, 정치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을 ‘비오스’라고 불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오스’, 즉 ‘정치적 존재’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갖는 공포심이다. 그것은 언제든지 정치공동체에서 부여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경우 ‘조에’ 즉 ‘벌거벗은 생명’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리킨다. ‘벌거벗은 생명’과 ‘정치적 존재’, 혹은 ‘조에’와 ‘비오스’는 ‘포함적 배제 관계’에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아감벤이 주목했던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벌거벗은 생명’들은 항상 살해될 수 있었다. 그들은 폴리스 외부의 존재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벌거벗은 생명’들을 자신의 체제 내에 포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주자의 인권, 여성의 인권, 심지어는 애완견의 권리마저도 보호한다고 선전하기 때문이다. 아감벤이 말한 ‘조에의 비오스’의 모색은 이렇게 출현한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심각한 난점이 발생한다. ‘조에의 비오스’는 조에로 상징되는 인간의 예속화, 그리고 비오스로 상징되는 인간의 권리 주장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체제에 의해 권리가 주어졌기에 이주자나 여성은 그 권리를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감벤의 지적처럼 근대 민주주의의 평등이란 이념은 ‘벌거벗은 생명’의 집요한 투쟁을 통해서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벌거벗은 생명’의 투쟁은 자신들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었던 권력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자발적 복종’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슈미트의 지적에서 나는 박정희 독재 정권이 생각났다. 독재 정권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북한을 불변하는 적으로 설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부 국민이 독재자에게 불만을 제기한다면, 그들은 곧바로 북한과 같은 적의 존재로 규정되면서 공격받게 될 것이다. 꼭 독재 정권만 그러한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다. 평화가 너무 오래 지속되니 국민들이 너무 나이브한 것 같아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이라크를 공격하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없었다. 결국 이라크 전쟁은 애초에 전략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없었기에 시작부터 이길 수가 없는 전쟁이었으며,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시작한 부시 행정부의 총체적 무능으로 인해 미국은 천문학적인 군사비 지출과 젊은이들의 죽음을 겪어야 했다.


홉스에 의하면 '자연상태'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개인들은 상호계약을 맺어 자신들의 권력을 한곳에 모아주게 된다. 그는 이것이 '리바이어던' 즉 국가가 탄생한 근본적 이유라고 말한다. 아감벤이 말한 '자발적 복종'의 상태가 이러하다. 자칫하면 민주주의를 옹호하려고 만든 투표 제도가 독재자 히틀러를 총통으로 뽑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종북몰이는 슈미트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례다. 슈미트는 국가가 내부적으로 분열될 때 외부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한을 적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내부의 불만을 억제하고 국민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도 사용되었던 방식으로, 국민들이 독재자에게 불만을 제기할 경우 그들을 적으로 규정하여 공격하는 방식이다.


한동훈 장관은 아감벤의 철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아감벤은 근대 민주주의가 표면적으로는 모든 사람을 포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에 의해 언제든지 권리를 빼앗길 수 있는 '자발적 복종' 상태에 있다고 지적한다. 한동훈 장관은 법과 질서를 통해 국민들을 통제하고,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는 '자발적 복종' 상태를 유지하려는 역할을 맡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종북몰이와 한동훈 장관의 역할은 각각 슈미트와 아감벤의 철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외부의 적을 설정하여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슈미트의 전략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동훈 장관은 법과 질서를 통해 권력의 지배를 강화하는 아감벤의 '자발적 복종'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현재의 정치 상황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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