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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a p Oct 28. 2020

쉬운 동양 철학 11

의상 VS 원효

661  명의 신라 스님이 원대한 포부를 품고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당시 당제국에는 불교가 인도보다  화려하게 꽃을 피우고 있었다.   스님이 육두품 출신의 원효와 진골 출신의 의상이다. 해탈이란 간절한 열망을 공유했기에  스님에게는 신분 차이가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유학의 꿈이 실현되려던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각자의 길을 떠나기 위해 이별을 준비해야 했다. 과연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연수라는 스님이  <<종경록>>  자초지종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 동국의 원효 법사와 의상 법사  분이 함께 스승을 찾아 당제국으로 왔다가 밤이 되어 황폐한 무덤 속에서 잤다. 원효 법사가 갈증으로  생각이 나던 참에 마침 그의 곁에 물이 고여있어 손으로 움켜 마셨는데 맛이 좋았다. 다음날 보니 그것은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 그때 마음이 불편하고 토할  같았는데  순간 원효 법사는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나는 부처님께서 ‘ 세상의 모든 것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 ‘모든 대상들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마침내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지극한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였다. -<<종경록>>

사실 원효와 의상의 극적인 이별,  오래된 사건은  이후 한국 지성이 선택할  있는  가지 가능한 길의 원형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마음과 삶에 대한 주체적인 통찰 혹은 외적인 이론에 대한 학습과 수업. 민중의 삶과 함께하려는 실천적 태도 혹은 민중을 계몽하려는 선각자의 계몽주의적 태도. 이중 먼저 의상의 철학부터 살펴보려 한다.

의상은 화엄종의 <<화엄경>> 방대한 내용을 단지 210글자로 요약하고 도표화해서 <<화엄일승법계도>> 만들 만큼 화엄종의 취지에 정통했다. 흔히 <<법성계>>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화엄일승법계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란 구절에서 시작해 미로를  바퀴 돌아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다.

의상 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

매타적으로 보면 <<화엄일승법계도>> 자체가 <<화엄경>> 압축한 일종의 암기법이었던 셈이다. 결국 엄청난 분량의 <<화엄경>> 독파할   210자의 글자는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일종의 지도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화엄일승법계도>>에는 <<화엄일승법계도기>> 붙어 있다. 210자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의상의 친절한 해석인 셈이다. 먼저 그는 30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설명한다. “먼저 앞부분 18구절은 자리행(自利行) 요약한 것이고, 그다음  구절은 이타행(利他行) 요약했고, 나머지 여덟 구절은 수행자의 방편과 얻을 이익을 구별한 것이다.” 여기서  가지 특징은 중생을 구제하는 부분이 스스로 부처가 되는 부분에 비해 현격하게 양이 적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중생을 구제하는 부분도 상당히 엘리트주의적이고 계몽주의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

우선 화엄 철학의 핵심을 파악한 승려가 화엄 철학을 대중 앞에서 설법한다. 목마른 사람에게 내리는 비처럼 화엄 철학의 정수는 진리에 목마른 중생들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자신들의 수준에 따라 도움을 얻을 것이다. 목이 너무나 말라  양동이를 가져오면 많은 물을 담고, 작은 양동이를 가져오면 적은 물만 담아 가는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법회에 참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목이 말라도 목이 마른 것을 모르는 것처럼, 정말로 구제 불능인 사람들일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과 자비심이 의상에겐 없었다.

의상의 사유에서는   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불교 사유의 핵심인 연기(緣記) 관련된 것이다. 놀랍게도 의상은 연기를 제대로 사유하지 못한다. 연기라는 원리에 따르면 원인과 조건의 마주침으로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하고,  마주침이 다할 때는 사멸해간다. 그렇지만 연기는 냉엄한 자연법칙,  이상의 원리를 지니고 있다. 비록 우리가 연기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우리는 스스로 원인이 되거나 조건이 되어서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있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싯다르타가 제안하고 나가르주나가 명료화했던 연기 개념을 의상은 전체론적 입장에서 심각하게 왜곡하게 된다. 이미 전체에 규정되어 있는데, 개별자가 어떻게 새로운 결과를 낳는 업을 행할  있다는 말인가? 만일 개별자가 새로운 업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미 우리는 전체를 넘어서게 된다. 최소한 과거 전체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했으니 말이다.

황폐한 무덤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원효는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해탈과 고통이  계기가 모두 내재되어 있다는 통찰을 얻는다. 그래서 마침내 원효는 <<대승신기론>> 가장 탁월한 주석서인 <<대승신기론소별기>> 쓰게 된다. 원효의 눈에는  책이 자신의 통찰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승신기론소별기>> 나온 <<대승신기론>> 따르면 인간이 가진 마음에는  가지 측면,  해탈의 마음과 번뇌의 마음이란  모두 있다. 해탈의 마음이 ‘심진여문이라면 번뇌의 마음은 ‘심생멸문이다. 연못을 예로 들면, 잔잔한 연못은 바람이 불면 요동치는 연못이 된다. 하지만 이경우 기존의 잔잔한 연못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요동치는 연못은 바로 잔잔한 연못이   있는 것이다. 원효에 따르면 번뇌에 사로잡힌  누구라도 번뇌를 제거하기만 하면 해탈한 사람,  부처가   있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부처가   있는 잠재성을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심진여문이란  여래장을 말한 것이라   있다. 그래서 부처가 되려면 우리는 심생멸문에서 심진여문으로 우리의 마음의 양태를 바꾸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기억에 의존하는 집착이 우리를 요동치게 만든다는 점이다. 요동치는 연못을 요동치게 하는 원인은 연못 내부에 이미 있다고   있다.  내부의 요동을 제거하면, 연못은 다시 잔잔하게 된다. 잔잔한 연못처럼 심진여문이 되었을 때 바로  상태를 해탈한 것이라고   있다. 그렇다면 진여문에 도달했을  우리에게는 생멸문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연못은 이제 내부의 동요로는  이상 요동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연못 바깥에는 다양한 타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고요한 연못이라고 해도 외부의 바람으로 인해 언제든 다시 요동칠  있다. 강한 바람이 불면 연못은 강하게 요동치고, 약한 바람이 불면 연못은 약하게 요동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탈한 자의 마음은 슬픔에 빠진 타자와 마주치면 슬퍼지고, 기쁨에 들뜬 타자와 마주치면 기쁘게 된다. 물론 이를 통해서 해탈한 자는  타자도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갖도록 도울  있다. 해탈을 달성해서 부처가 되어도 생멸문은 작동할  있다. 부처가 되기 이전의 생멸문은 번뇌의 마음이지만, 부처가  이후의 생멸문은 자비의 마음이다. 번뇌의 마음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집착, 아집(我執) 대상에 대한 집착, 법집(法執) 사로잡혀 있다. 고요한 물처럼 번뇌가 가라앉은 마음이 오면, 그제야  우리는 세상에 제대로 대응할  있게 된다. 문제는 부처의 마음으로 바라본 세계와 중생들의 모습이 살풍경에 가깝고 그만큼 측은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부처의 마음은 심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든 간에 맑고 고요한 마음을 유지하는 ,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강력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열심히 전에 배운 것을 복습했다면  대목에서 혜능이 생각나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닦는 것이 가장 강한 집착이라 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얼어붙어 투명한 연못의 빙판처럼 세상을 냉랭하게 관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주 조그만 미풍에도 흔들리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연못의 표면처럼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원효는 열반의 아이러니를 말했던 것이다. “열반에 들어가지만 모든 부처들의 동체대비 때문에  열반을 빼앗겨버리고 만다.” 이것은 열반에 이른 모든 수행자들이 겪는 아이러니다.

의상은 ‘전체=개체라는 도식으로 “부처에게는 개체가 전체이고 전체가 개체일 뿐이다라고 표면적으로는 개체의 위상을 높이려 했지만 결국 개체의 모든 행동을 전체 질서로 미리 규정해버렸다. 그래서 개체의 능동성을 긍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우리는 능동적인 존재이기에 새로운 업을 수행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것이다.

원효는 해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열반에 이르면 아무런 고통과 집착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 열반에 이르니 주변 사람들의 아픔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든  마음만 맑고 고요하게 유지해서는   것이다.  하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관점에서 타인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은 나로서는 고요하겠지만 타인으로서는 시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 서적: 강신주 철학 vs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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