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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Feb 07. 2021

소멸

이강소 개인전


소멸, Disappearance, 1973/2001, Mixed media, Dimensions variable



볏집으로 엮어낸 푹신한 멍석 위에 주먹만한 사과 이십여개가 있다. 

누군가 트럭에 포대 째로 싣고 와서 대충 쏟아 부어 놓고 간 듯한 모양새다. 옆에 놓인 작은 통에 2000원을 내면 사과 한 알을 집어갈 수 있다. 파란 천원짜리 엿댓장이 들어있다. 누군가 사과를 집어갔을거다. 반동적으로 내 지갑에 천원짜리 두 장이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는다. 아. 만원짜리 뿐이었지.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작품 대신 선술집 정겨운 풍경이 펼쳐진다. 하얗게 티끌하나 없는 벽면과 반들반들 윤이 나는 바닥 마감재로 뒤덮인 전시장 한복판에 이리 선술집을 꾸며놓으니 어쩐지 어색하기 그지 없다. 긁히고 패이고, 담배불에 지져 상처난 낡은 나무 탁자와 의자들위에 성냥갑, 찌그러진 양푼 주전자와 양푼그릇들이 듬성듬성 놓여있다. 탁주는 한 잔에 2000원. 사람들은 전시장 안의 이상스런 선술집에 앉아 한 잔 두 잔 기울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딘지 잊어가겠지. 희미한 막걸리의 탁한 색 만큼 사람들은 마주앉은 채로 희미해져갈 것이다. 지금시대라면 혼술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것이다. 여럿 모여있을 때와는 달리 혼자 외로이 탁주를 소리없이 들이켜고 쓸쓸히 사라져가는 누군가의 모습은 또 얼마나 씁쓸한가. 가슴이 쓰라려 온다. 


전시장 2층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무제-75031’이다. 원형의 공간 바닥에는 밀가루가 엉망진창이다. 자세히 보면 닭 발자국이 선명하다. 전시의 오프닝 날, 흰 닭 한마리가 밀가루를 뿌려놓은 이 공간을 휘집고 다니며 걷고, 쉬고, 모이를 먹고, 물도 먹었다. 멀뚱멀뚱 서 있기도 했고, 괜히 발을 휘적거려보기도 했고,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가루를 공기중으로 흩날리기도 한게 분명하다. 닭이 머물다 간 자취가 바닥에 남은 흔적에서 고스란히 보인다. 하나의 생명이 이곳에 머물렀지만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그 흔적 조차 곧 사라질거다. 


재료의 사용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닭이나 밀가루, 사과, 막걸리, 선술집, 굴비등은 퍽 우리에게 친근한 일상의 사물들이다. 이강소는 이 친근한 사물들을 그리 웅장하고 크게 만들생각이 전혀 없었던 듯 싶다. 이런 재료에 대한 접근 방식은, 예를들어 엘 아나추이나 마르셀 브로타르스와는 대조적이다. 매우 평범하거나 그 이하의 재료들, 이를테면 버려진 폐품이나 병따개 등 이 사물들이 그 평범함을 뛰어넘어 웅장한 것으로 거듭나곤 한다. 브로타에스의 알멩이가 없는 홍합이나 달걀 껍데기는 버려질 위기에 있다가 잘 씻기고 유약으로 코팅된 후 액자나 냄비에 붙어 완벽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조각으로 태어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처럼 완벽하게 다시 태어난 것들 사이에서 이강소의 사물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소박함을 그대로 지닌 채 점차 소멸해간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감동을 지녔다. 



생김과 멸함, Becoming and Extinction, 1974/2018, Apple, bowl, straw mat, Demensions variable



무제-75031, Untitled-75031, 1975/2018, straw mat, rope, chalk, powder, c-print, Dimensions variable



굴비, Gulbi, 1972/2018, Dried fish, coffin lid, chalk



특별한 개념 안세워놔요.
 분명한게 있다면, 모든건 희미하다는 것 뿐이지.
살다보면 다 똑같은 세상인데.
그걸 작품으로 한번 소통해보겠다 뭐 이거죠.

이강소



그의 작품들 앞에서 작가의 의도대로 우리는 내키는 정도로 상상하면 되는 것이다. 딱 그만큼만. 불친절하고 무성의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강소의 작품은 이상하게 그게 가능해진다는게 내 마음을 파고든다. 아주 수월하고 자연스럽게. 그가 별 생각없이 닭을 풀고, 꿰어 말린 굴비를 가져다 거는 것처럼. 무심함이 주는 예상치못한 충격같은 것. 왜 우리 인생에도 그런게 있지 않은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무심히 한 말과 행동. 우리가 무심한 끝에 찾아온 결정적인 순간들. 무심한 선택이 가져오는 놀라운 결과같은 것들. 따지고보면 다 스쳐가는 것 들이다. 선술집에 사람들이 앉았다 사라지고, 가져다놓은 사과가 사라지고, 닭 한 마리가 온 바닥을 헤집고 다니다가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는데 곧 그 흔적마저도 사라지는 것처럼. 우린 다 꾸며진 무대, 그 환상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질. 참으로 무상한 존재들이다. 이토록 유쾌한 작업들의 끝에는 허무와 상실이 있다. 어쩐지 말라 비틀어진 굴비의 눈이 슬프고도 아름다웠더라니.



여백, Void, 1971/2018, Reed, paint, plaster, Dimensions variable






이강소

이강소는 1943년 대구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현재 안성에서 작업 활동을 하고 있다. 이강소는 1985년 국립경상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객원 교수 겸 객원 예술가로 활동하였으며, 그후 1991년부터 2년간 뉴욕 현대미술연구소(PS1) 국제스튜디오 아티스트 프로그램에 참여하였다. 이강소는 실험적인 작가이며, 그림, 판화, 비디오, 퍼포먼스, 입체 환경적 설치, 사진, 도예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의 작품성을 표현하는 예술가이다. 또한 작품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길 원하는 작가이다. 그는 공리성을 배제한 채 삶의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여 관객들이 이해를 할 수 있기를 원하며, 복잡한 세계의 틀에 박힌 관념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의 본질을 표현하려고 한다. 1975년 제9회 파리 비엔날레에서 이강소는 <무제 75031>라는 제목의 닭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전시장 바닥 한가운데에 말뚝을 세워 주위에 회분을 깔아 놓고, 닭의 다리를 끈으로 묶어 말뚝에 연결한 이 작업은 파리 비엔날레 기간 동안 살아 움직이는 닭이 작가가 만들어내는 굴레 안에서 닭의 의지만으로 먹고 움직여 발에 뭍은 회분이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작가는 닭의 행동범위만을 조절했고 닭의 행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작가는 의도적으로 작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그가 만들어낸 틀 안에서 인위적이지 않고 직감적으로 작품을 창조한다. 

이강소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오리, 배, 사슴은 형상을 인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 사고를 배제한 채 손의 감각과 자연스러운 호흡을 따라가는 것을 통해 관객이 인식할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리가 자유를 상징할 수도 있고, 유령 같아 보이는 배는 고독과 정신적 성찰에 대한 은유로 이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특정한 무엇도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직감과 유희로 만들어진 그의 작품을 관객이 스스로 상상하고 이해하길 원한다. 창작물의 완성보다는 창작의 과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둔 이강소는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만으로 단순히 설명할 수 있는 작가는 아니다. 작가가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접해온 동양 철학은 그의 작품 안에 내재 되어있다. 그것이 바로 이강소를 서구의 추상표현주의나 미니멀리즘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이강소의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앤알버트미술관(런던), 일본 미에현립미술관(미에), 국립현대미술관(과천), 대구미술관(대구), 부산시립미술관(부산),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호암미술관(용인) 등 국내외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갤러리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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