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와 카오스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헤르만 헤서 -데미안-

by Sophie

# 유토피아와 카오스가 공존하는 세상세서 – 데미안의 가르침


어릴 적 나의 세계는 유토피아에 가까웠다. 가정에서는 따듯한 잠자리와 깔끔한 옷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부족하지 않게 제공되었고 학교에서는 공평하게 적용되는 시험이라는 기준에 따라 나의 능력이 평가되었다. 인간관계의 폭 또한 단조로웠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부모님은 성실하게 자식들을 부양했고, 여동생과는 크게 싸울 일 없이 심심할 때 같이 놀고 서로 의지하며 지냈다.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기본적으로 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분들이셨고 또래 친구들도 성격이 가지각색이긴 했지만 서로 조화롭게 어울릴 줄 아는 아이 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어린 시절 나는 그런 좁고 안락한 세계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고, 사랑과 존중과 배려가 당연하다고 믿는 관계 안에서 꽤나 이상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도덕시간과 윤리시간에 배운 것들을 충실하게 지키며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나는 철학과 인문학에서 가르치는 이상적인 가치를 따르고 대신 신에게 기도하는 법은 모르는 사람으로 길러졌다. 부족함 없는 보살핌을 받는 안전한 울타리에서 신에게 기도할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보다는 돈과 지식과 명예 따위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랐기 때문에 신에게 기도하는 건 나약한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던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내가 울면서 신을 찾았던 것은 호주의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깜깜한 밤거리에서 길을 잃었을 때였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홈스테이 하는 집으로 찾아가야 했는데 심각한 길치였던 나는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주소만으로는 도저히 집을 찾을 수가 없어, 절망에 빠져 쪼그리고 앉아 처음으로 제발 제가 집에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고 믿지도 않는 누군가를 향해 기도를 했다. 그때 아이를 태우고 가던 어떤 호주인 부부가 울고 있는 나를 보았고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호의를 베풀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나에게 모르는 사람의 차는 타지 않아야 한다는 규칙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를 태우고 있던 차라 안전할까라는 생각도 더해져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그 차에 탔다. 그리고 다행히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집에 귀가할 수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기도가 더욱 절실했다. 특히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나는 매일 밤 내가 그녀를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만큼 시어머니는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시어머니라는 이유로 부당한 요구도 서슴지 않고 종국에는 나를 험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결혼 전에는 나에게 한없이 친절하시던 분이 그렇게 변해버린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혹시나 내가 좀 더 잘하면 시어머니도 나를 잘 대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부질없는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 그분과 나는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안부전화를 자주 드리고 기념일도 챙겨드리면서 좋은 고부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결혼 전 소망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결혼기간 내내 내가 그녀를 미워하는 마음을 키우지 않고 며느리로서 도리를 저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다.


뱃속에 둘째 아이가 기형아 판정을 받아 떠나보냈을 때에도 기도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기형아 판정이 잘못된 것이기를 뱃속에 아이가 건강하기를 기도했었고, 아이를 떠나보내면서는 아이가 부디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도했다. 또한 아이를 포기한 나를 용서해 주기를 기도했다. 아마 내가 태어나서 했던 제일 절박한 기도였을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기도를 멈출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이 기도하는 것뿐일 때가 많았다. 그 기도는 아직 세상을 마주할 힘이 부족한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는 절박함과 엄마의 의무를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기도는 인생을 살면서 내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릴 때마다 그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인생을 내가 계획하고 생각대로 살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고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그런 점에서 나의 기도는 내 삶을 더 선하고 더 행복한 길로 인도해 달라는 기원보다는, 주어진 운명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답을 찾는 과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기도는 뚜렷한 답을 주지 않았고 답을 찾기 위한 나의 기도는 무수한 고민과 방황을 반복했다.


싱클레어의 어린 시절은 나와 비슷했다. 그는 부모님이 정해준 다소 엄격한 규율 속에서 안전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로머를 만나면서 싱클레어의 삶은 변하게 된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약점을 잡고 그를 조정하며 괴롭힌다. 더 나아가 크로머는 싱클레어가 자신의 악행을 대신 실행에 옮기게 만들기도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이 죄가 완벽한 부모님에 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크로머가 시키는 대로 조정당한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고 크로머에게서 벋어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싱클레어는 데미안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 안에 있는 선과 악, 그 속에 욕망과 마주한다. 그리고 피스토리우스, 베아트리체와 에바부인을 만나면서 더욱 자기 내면의 세계를 공고히 한다. 나는 특히나 싱클레어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끼친 카인과 아벨, 아브락 삭스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선과 악, 이상과 욕망의 충돌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정답이 없다는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들에서, 어릴 때 이해하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비교적 느리게 어른이 되었다. 그동안 교육과 독서를 통해 살아가면서 받는 인생의 선택지에서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막상 어른이 되고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은 종종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혼도 그랬다. 이혼하는 과정에서 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아끼는 완벽한 사랑의 모습이 신기루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주었던 그가 고통을 주는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면서 느꼈던 사랑과 분노의 감정에도 의문이 들었다. 나를 사랑했을 때는 더없이 선했던 사람이 단지 나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야 하나?. 그 모호한 선악의 구분 속에서 나는 그의 행동을 용서하기보다는 받아들이기를 선택했고 그 후 이혼을 받아들이고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는 일이 조금은 수월해졌다.


앞으로도 이혼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이혼이라는 경험보다 더 많이 나를 무너뜨리고, 혼란에 빠뜨릴 일을 맞닥트리게 될 때가 것이다. 그 카오스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삶을 살아 내야 할까? 싱클레어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새가 알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은 몸부림을 쳤다. 나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혼란과 절망을 감당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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