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이 아니라 판단이 느려!

운전면허 취득기 03

by 솦히

[장내 기능 교육]


학과 교육과 필기시험을 마친 뒤, 장내기능 교육을 받고자 학원에 갔다. 이틀씩 두 시간이라지만, 사실 2시간 꽉 채우는 것이 아니고 50분씩 2교시여서, 한번 갔을 때 한시간 반씩 수업을 들었다. 이틀이면 세시간인데? 그러고 시험을 보게 해 준다니.


학원에서 수업 시간을 예약하면 수업표를 출력해주는데, 거기에는 날짜와 시간, 선생님 성함이 써있다. 수업 시간에 맞춰 수강증 카드를 기계에 긁으면, 배차증이 나온다. 처음 등록할 때 '10분 이상 늦으면 수업을 한걸로 쳐서 교육에 추가요금이 붙으니 절대 지각하면 안된다'는 엄포가 있었다.


내가 등록한 학원은 신도림에 있는 '신도림 자동차운전전문 학원'이다. 집 근처에서 2호선을 타고 신도림역에서 내린다. 같은 2호선이지만 삐쭉 튀어나온 까치산행으로 환승한다. 도림천 역에서 내려 한 5분을 걸으면 학원에 도착한다. 신도림역에서 셔틀을 운행한다는데, 출근 시간에 수업을 잡아둔지라 수많은 인파를 뚫고 출구를 찾아 나가느니 비교적 한적한 까치산행을 타는 것이 낫다.

도림천.jpg

20분 정도 일찍 도착하여 배차증을 뽑고, 어디로 갈 지 두리번 두리번. 마침 데스크에 계신 직원 분이 매점 옆에 보면 계단이 있으니 그 아래로 내려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다들 긴장한 모습인건지 내가 긴장해서 모두가 긴장한 것 처럼 보이는지 모르겠다. 수업 시간이 1,2분 정도 남자, 똑같은 와이셔츠와 바지를 입은 강사들이 학생들 쪽으로 왔다. 그러고는 이름을 불러 한명씩 데리고 나갔다. 내 이름이 언제 불리나 귀를 쫑긋하게 된다.


우리 엄마 연배의 여강사님이었다. '25번 차 탈게요.' 하는 말에 크고 씩씩하게 '넵!' 하고 대답했다. 조수석에 앉으세요, 하더니 종이 하나를 건네고, '여기서 오르막길, 여기서 좌회전, 여기서 주차, 여기서 우회전, 여기서 가속구간 하고 들어오면 되요. 주차는 공식 다 알려줄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운전석으로 오세요.'


운전석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앉아보는 장소이다. 나는 늘 운전석의 오른쪽을 든든히 지키는 조수석인간인데? 아무튼 앉으라니까 앉는다. 그리고 조수석에는 강사님이 밟을 수 있는 브레이크가 있다. 모든 자동차에 있었으면 좋겠다.



첫 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수업을 마쳤다. 여기서 멈추라니까 멈추고, 여기서 핸들을 반바퀴 감으라시니 감을 뿐,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속 구간은 시속 20km이상으로 한번 밟는 것인데, 카레이서가 된 줄 알았다. '네? 제가 선을 밟았다고요? 선이 안보이는데요?' '그러니까 밟았다는거에요.' '아하'

내 몸도 내 뇌와 삐그덕하는데, 내 뇌와 내 몸에 자동차까지 추가시킬 수 있나. 이거 나만 이렇게 어려운건가. 그저 얼이 빠진 채로 한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말은 '학생은 행동이 느린게 아니라 판단이 느리네. 미리 핸들을 돌렸어야지요' 였다. 살면서 그런 피드백을 듣다니. '판단이 느리십니다.' '판단력이 부족하군요.' 앞에 붙은 '행동이 느린게 아니라'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나는 나 자신을 빠릿빠릿하다고 여기며 살아왔는데!


집에 와서 매우 시무룩죽죽한 채로 누워있었다. 남편은 위로해주는 것 같았는데 약간 신나보이기도 했다. 같이 귀멸의 칼날 3화를 봤다. 주인공인 탄지로에게 계속해서 '판단이 느려!' 하는 사부님(?)과 사비토의 대사가 나를 향하는 것 같아 웃기면서도 슬펐다.


유튜브에 올라온 시험영상을 보았다. 세상에는 친절하고, 재능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작은 장내에서도 '길을 외운다' 생각할 정도인 나는 영상을 보며 선생님이 오전에 준 종이 위에 어디쯤인지 표시해갔다. 집에서 가장 둥근 냄비받침을 잡고 연습까지 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어느정도 시간을 써서 노력했다는 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둘째날에는 매점 옆 계단으로 내려가지 않고, 실제 시험장에서 교육을 받았다. 어제와 같은 강사님이 기기 조작하는 것을 테스트해주셨고, 시험처럼 안내음성을 틀어주었다. 어제 시험영상 열심히 봤으니 침착하게 해야지 생각하고 출발하자마자 경사로에서 '실격입니당' 음성이 나왔다. (ㅇㅅㅇ..? ) 엑셀 콱 밟고 올라서서 브레이크 뿍 밟았는데 경사로 정상에 서 있는 노랑 자동차. 사이드미러로 보니 저 멀리 직사각형의 끝 선이 보인다. 그 뒤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았지만, 시험보는 순간까지 '경사로에서 실격하면 뒤에 아무것도 못해본다'는 생각에 떨었다. 첫 날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오른쪽 차선 씹기 직전이다.'와 '핸들 너무 많이 움직인다.'는 피드백을 주셨다. 모의고사 처럼 진행된 한시간 반의 교육에서 첫 실격을 제외하고는 연이어 통과했다. '어제보다 침착하게 잘 했다'는 강사님의 칭찬에 자신감을 갖고 시험을 접수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영상 시청과 주차연습은 계속되었다.



'주차할 때, 손잡이 끝 보라고 하셨어요?' 시험 대기 중에 옆에 있던 여자분이 물었다. (엥? 나한테 묻는다구?) '네 저는 손잡이 끝에서 45도 되는 곳에 맞추라고 배웠어요!'라고 답했다. 근처에 있는 다른 남자분도 '저도 그렇게 배웠어요!' 라며 거들었다.


이 학원의 단점을 굳이 찾고싶지 않지만, 기능시험에서 떨어지면 시험장을 내려다보는 2층에서 원서를 집게에 달아 1층으로 떨어트린다는 것이다. 창가에 앉아 경사로에서 힘들어하는 트럭을 보고 있었다. '남일같지 않군.' 하고 있었는데 트럭에서 그 분이 내렸고, 내 옆에 있는 유리창으로 그 분의 원서가 툭 내려왔다. (자닌해..)

그 수모를 겪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시험을 시작했다. 옆에 아무도 없이 운전하는 기능시험의 순간이 왠지 울컥하고 뿌듯하다. 하지만 옆에 아무도 없지 않은 것처럼 시험보는 내내 쉴새없이 말을 했다.

' 오 경사로~ 짠! 잘 올라왔어요. 좌회전 착착착 신호등 잘봤고여 주차는 저기에 할거에요. 오른쪽으로 다 돌리고 쏙 들어가고~ 평행일때 멈추고 짠 어 너무 잘하고 있어요~ (중략) 나오자마자 비상등! 오히려 좋아여~ 가속 부아앙 이제 돌아갈거에요~ 마지막에 깜빡이 켜야해요~' 하면서 100점으로 기능에 합ㄱㅕㄱ! 꺅 신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았읍니다. 고맙습니다. 유튜브에 촬영해서 장내기능 시험보는거 올려주신분. 정말 감사해요.



매거진의 이전글도덕 교과서 같은 것만 고르면 된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