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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Feb 28. 2024

비로소 새해


학창 시절 친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가치관도, 직업도, 향유해온 문화도 너무 다르기에 지속된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초등학교 친구는 겨우 하나, 중고등학교 친구는 대여섯, 대학 동기는 그보다 조금 더 남은 것 같다. 


일을 시작하면서 사람을 많이 남겼다. 내 일은 여러 면에서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지만, 취재라는 명목하에 근사한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내 안의 세계는 확장되었고, 치우침과 편협함으로부터 조금은 빗겨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난 소중한 인연들은 잔뜩 남았지만 이들은 모두 만나기엔 시간도 에너지도 너무 부족하다. 예전엔 그저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국은 에너지 문제로 만남을 미루는 일이 컸음을 깨닫는다. 건강해야 한다는 걸 나이 들수록, 귀한 관계들의 가치를 떠올릴 때마다 내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임을 안다.


스트레스 관리에 실패해 몇 날 며칠을 컨디션 난조로 보냈다면, 그 시기엔 만나길 고대했던 누군가와의 약속이 그저 해치워야 하는 과업처럼 마음을 짓누르기 십상이다. 그런 기분을 안고 있다는 사실은 죄책감과 자기 환멸을 가져다주며 관계를 망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도무지 약속에 나갈 수 없을 것만 같은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아파서 못 나간다고 할까. 나 하나쯤 빠져도 분위기엔 큰 타격을 줄 것 같지 않은데. 생각 자체가 참으로 악하다. 그렇게 신나게 약속을 잡아 놓고는 무책임하게 당일 아침에 나가지 않겠다는 핑계나 찾고 있다니.


다행히 오늘 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단톡방에 하지 않았다. 억텐을 최대한 끌어올려 샤워를 하고 단장을 했다. 새로 산 셔츠까지 꺼내 입으니 밖에 당장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일으켜졌다. 


오늘 만난 세 명과는 각각 만나지 못한 시차가 달랐는데, 그 갭을 왜 그대로 방치했을까 후회될 정도로 다시 만나 수다를 떨기 시작한 순간 깨달아졌다. 이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놓치고 살았구나. 내 삶에 대체 이들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기에 연락도, 만남도 미뤄둔 채 지냈을까 싶었다.


만나야 비로소 관계와 사람의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다는 화석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몸 상태에 지지 않고 이 자리에 나올 수 있었음에 잃었던 감사함을 되찾는다. 이들의 근황과 다정한 웃음과 웃겨 죽겠는 이야기와 마음이 듬뿍 담긴 선물까지 받아 안는 동안 휴대폰 한 번 쳐다볼 새가 없었다.



인생의 자랑은 십수 년간 일하면서 모은 초라한 돈도 아니고, 미미한 명예도 아니다. 사람이다. 내게 자랑할 것이 인품이 훌륭하고 절차탁마를 게을리하지 않는 다정한 사람들임을 정작 나 자신이 잊고 살아가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어디가 아프고, 너무도 피로하고, 매일 해야 할 일들이 주머니의 잔돈처럼 짤랑거리며 스트레스를 안기는 까닭에 나는 고립되었던 것 같다. 그게 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풍요로웠던 지난날과 같은 시간이 도무지 요즘엔 없다는 아쉬움은 나이듦의 자연스러움인 줄 착각했다.


좋은 이들과의 만남을 늘리는 일이 너무도 귀하다. 내 안의 세계를 넓혀주었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올해는 아직 열 달이나 남았고, 겨울이 지나 봄이 돌아왔으니 건강을 회복하는 데 좋은 시기를 맞기도 했다. 


삶은 너무나 유한하고, 나를 지키며 여러 관계를 이어나가기란 고스톱 점수 따기와는 다르다. 공이 든다. 우연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인생의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운이 좋았던가. 


소중한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는 밤이다. 너무 많은 이름이 감은 두 눈 위로 무수히 지나간다. 모두 다 지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는 평생의 동반 관계로 가꿔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건강하자. 매일 좋은 것을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좋은 것을 보고 생각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자. 하루가 평생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자. 


2월의 마지막 날을 남겨둔 오늘에서야 청룡의 해를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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