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아주 많이 한 날이었다. 세탁기를 돌려놓고는 냉장고 청소를 했다. 먹을 수 없는 식재료가 많아 죄스러웠다. 냉장고에 살아남은 건 몇 안 됐다. 텅 빈 냉장고. 이 크고 깊은 데를 채우며 어떻게 사나, 파도 같은 막막함이 밀려와 울컥했다. 냉장고를 벅벅 닦았다.
세탁기를 네 번쯤 돌렸을 때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빨래를 널다 말고 식탁에 앉아 한 1분쯤 소리 내어 엉엉 울다가 다시 빨래를 널었다. 이제는 건조대에 빨래를 널 만한 자리가 없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자리가 부족해. 하긴 내가 한 건 빨래를 기다린 일이구나. 기계의 노동력이 내가 한 집안일에 수반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집안일 분량 싸움에 마음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갔다. 나는 냉장고처럼 텅 비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난 지 한 달쯤 되어간다. 일을 그만둔 건 좀더 오래됐지만, 그동안은 건강 회복에만 전념했고 그 기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기억에 남은 날은 30일쯤, 그리고 오늘은 빨래를 많이 한 날이었다.
건조대에 자리를 얻지 못한 빨래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그 옆에 나도 누워본다. 축축하고 향긋해. 갈 자리도 없는데 왜 향기로우려고 해. 허공에 대고 나만 들을 수 있는 말들을 자꾸만 중얼거린다.
대충 남은 빨래들을 건조대 이곳저곳에 욱여넣고 짝꿍이 오는 시간을 기다린다. 한 30분쯤 지나면 올 거다. 이 루틴은 아주 달콤하고도 중독성이 강하다. 위험하다.
무용 수업이 있는 날은 저녁을 적게 먹는다. 이 저녁에 관한 보다 깊은 이야기는 언젠가 꼭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은 못할 것 같다. 내가 듣는 수업은 현대 무용 초급과 중급 사이다. 정확한 레벨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초보인 사람들과 중급 수준의 사람들이 뒤섞인 반이다. 수업 중후반부에 안무 시퀀스가 있는데, 그에 앞서 우리는 미친듯이 달린다. 달려야 하기 때문에 속을 가득 채울 수가 없다. 몸이 무거운 건 둘째치고, 제대로 달리고 싶기 때문이다. 달리면 기분이 나아진다. 젖은 빨래 같았던 나는 달리기를 시작하면 바싹 마른 건조하고 가벼운 빨래가 된다. 비로소 다시 젖을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사과 반쪽 반숙란 두 개를 먹고 학원에 도착했다. 집에서 학원까지 도보로 10분 거리. 걷는 동안 먹은 게 다 소화된 것 같다. 종일 먹은 게 커피 한 잔뿐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달릴 준비를 제대로 했지만, 오늘은 달리기를 하지 않는단다. 왜. 달리고 싶었는데. 너무 서운한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용 선생님이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듯 어렵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가시기에 외면할 수 없었다.
여러분, 오늘은 그동안 배웠던 동작들을 활용해 즉흥을 해볼 거예요.
-?
다 같이 몸 풀고 한번 움직여 볼까요?
-?
(미소)
-?
선생님 말을 듣지 말고 도망쳤어야 했다. 무용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그만두고 싶어졌다. 즉흥을 어떻게 하나. 막막한 마음에 온몸이 굳어져갔다.
선생님은 너무도 해맑게 우리가 잘할 거라고 말했다. 대체 그게 무슨 무책임한 말이냐고 되물으려다 그동안 우리를 가르친 사람이 하는 말을 멋대로 무시하는 무례함을 거두고, 눈을 질끈 감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나도 나지만 짝꿍도 멘붕일 거였다. 너도 나랑 같은 맘이지? 괜찮니? 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는데, 세상에. 짝꿍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왜, 반짝여? 너는? 마음으로 물었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그는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신기하고 낯설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다 까먹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