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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스트 Jan 10. 2017

그렇게 자취생활은 시작되었다.

가난은 자취를 낳는다.

97학번 OO대학교 건축공학과 신입생.

1997년 내게 새롭게 부여된 신분이었다. 고등학교 3년 과정을 겨우 버티고 버텨서 얻은 새로운 신분이다. 물론 내가 딱 원하던 신분은 아니었다. 원하던 학교도 아니었고 전공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당시 유행했던 그리고 취업이 잘 된다는 소문만 듣고 선택한 전공이었다. 당시에는 취업이 잘 된다는 소위 잘 나가는 학과였으나 내가 졸업할 때 즈음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이 세상은 나 몰라라 시치미를 땠다. 여하튼 그때는 그런 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이제 내가 대학생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가 중요했다. 재수는 죽어도 하기 싫었고 학교 간판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그런 호기가 넘치던 때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학교 간판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대학생 새내기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핑크빛 환상을 두뇌 전두엽과 후두엽에 새겨놓고서는 망나니처럼 폴짝거렸던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그러하듯 우리의 기대와 상상은 세상의 거친 현실과 딱 일치하지는 않았다. 입학식을 하기 전부터 현실의 가혹함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가혹함은 의식주와 관련이 있었다. 먼저 이 한 몸 뉘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는데 당시 우리 집 형편으로는 정말 딱 한 몸 누울 수 있는 곳만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고시원을 선택했다. 하숙집은 너무 비쌌고 기숙사는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오직 나를 받아주는 곳은 월 12만원의 고시원이었다. 고시원을 어쩜 그렇게 잘 만들어 놨는지 재단한 듯 딱 내 몸 하나 누울 수 있었다. 물론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놓고 책상 밑으로 내 다리를 집어넣어야 했지만 말이다. 첫날 이 고시원에서 잠을 잘 때, 나중에 죽으면 관을 이 정도 사이즈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학교 생활도 그리 즐겁지는 않았다. TV에서 보던 것 같은 낭만적인 상황은 생각보다 많이 발생되지 않았다. 가끔 학교 주변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최루탄 냄새가 진동을 해 눈이 따가웠던 이벤트들이 가끔 발생하는 정도였다. 왜 학교 주변 보도블록이 맨날 박살이 나있는지 입학 초기에는 알 수 없었지만 반년도 안돼서 내가 그 보도블록을 깨고 그것을 전경들에게 던지고 있을 줄은 당시에는 꿈에도 몰랐다. 고시원에 살면서는 일찍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 좁은 공간에 들어가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들어가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말도 못 하였고 기침도 못하고 심지어 방귀도 시원하게 뀌지 못하는 곳이었다. 학교를 배회하다 밤 12시 가까워서야 고시원에 들어가 씻고 잠이 들었다. 


다행히 2학기가 되면서 거룩하신 '기숙사'님께서 나를 받아주었고 그제야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겨우 반년뿐이었다. 이상하게 학교가 다니기 싫었고 우울했고 만사가 귀찮았다. 군대를 핑계로 학교를 휴학했다. 휴학한 자 따위에게 기숙사는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휴학을 했지만 또다시 주거지의 불안함이 나를 엄습해왔다. 어쩔 수 없이 학교 근처 집단 하숙집을 구해야 했다. 하숙집이라고는 하나 밥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밥을 먹으려면 따로 돈을 내야 했다. 그 밥값도 만만치 않았기에 학생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로 하고 방값 16만원을 주고 생활했다. 휴학하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이 방값과 식대를 마련했다. 아르바이트는 고깃집에서 시간당 2,200원을 받는 조건으로 일을 했다. 당시에는 최저시급이고 뭐고 이런 것도 모르던 때였다. 그냥 그 주변의 시세로 알바의 시급이 결정되었다. 더욱이 당시는 IMF사태로 인해 많은 대학생들이 알바시장으로 쏟아져 나왔으니 '수요-공급의 법칙'으로 인해 일할 곳이 있다는 그 자체만이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나에게는 식당일이 좀 고되긴 해도 노래방이나 당구방 알바보다는 몇 백원 시급이 더 많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래도 저 하숙집 같지도 않은 하숙집에 주는 돈이 아까웠다. 내 월급의 1/3을 뜯어가는 것을 어찌 바라만 보고 있겠는가. 더 싼 집을 찾아 옮겨가고 싶었다. 어느 날 우연히 동아리방을 저녁 즈음에 들렀는데 동아리 동기 녀석 하나가 니어카를 붙들고 낑낑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뭐하냐고 물었다. 

그 녀석은 이사를 간다고 했다.

어디로 가느냐고 했더니 'ㅇㅎ마을'로 간다고 했다.


'ㅇㅎ마을'

익히 알고 있는 곳이다. 우리 선배들도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나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선배들의 말에 의하면 전생에 죄를 많이 짓거나 현생이라 할지라도 사람답게 살지 않는 자들이 기거하는 곳이라고 했다. 요샛말로 흙수저들이 마지막으로 밀려나는 그곳. ㅇㅎ마을 자취촌. 

물론 그곳에 터를 잡고 사는 분들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오해 없으시길..


나는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내 친구가 불쌍했지만 방값을 듣고 나자 나도 같이 가고 싶었다. 

한 달에 8만원이란다.

 그 자리에서 나도 같이 살아도 되냐? 라고 물었더니 친구는 흔쾌히 말한다.

"나야 좋지"

그 자리에서 그 친구가 구한 집으로 니어카에 짐을 싣고 그 어두운 밤에 이동을 했다. ㅇㅎ마을 중에서도 맨 끝집이다. 손바닥 만한 창이 있었고 공동 세면대를 사용해야 했고 공동 세탁기를 이용해야 했다. 방 크기는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되었다. 


이렇게 나의 자취생활은 시작되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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