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e Jun 16. 2022

매스,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

돌이킬 수 없는 과거 앞에 선 네 사람

컬럼바인 이후 수많은 비슷한 사건들이 줄을 지었다. 불과 몇 주 전, 텍사스의 초등학교에서 또 많은 아이들이 희생됐다. 총이, 가끔은 차량이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덮쳐서 몰살하는 광경이 지구촌 곳곳에서 흔해졌다. 4년 전, 토론토에서 자기와 성관계를 갖지않는 여성때문에 화가 났다는 이유로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향해 빌린 밴을 몰고 질주한 남성이 최근 25년 동안 가석방 가능성 없는 종신형을 받았다.


왜 유독 총기난사 사건에 마음이 쓰이는지를 들여다보면, 아마 그 사건이 대부분 어떤 것들을 대표하는 집단이 모여있는 공간이 아닌, 그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비슷한 비율로 섞여있을 수밖에 없는 학교에서 일어났고 범인들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고립됐거나 혹은 그렇다고 느끼는 인물들이어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가까운 가족 구성원이 벌인 형언할 수도 없는 사건으로 삶이 통째로 망가져버린 주변부 인물들의 마음이 너무 … 해선 것 같다.


대학교 졸업작품으로 총기난사 사건을 벌인 범인 주변부 인들의 얘기를 그렸었다. 그와 함께 자라고 먹고, 아니 애초에 그를 낳고 기른 사람들이 사건 이후에 어떤 시간을 보낼지를 상상해보게 했던 것은, 버지니아 테크 대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 씨의 누나가 사회에 내밀었던, 사과문을 읽고 나서였다.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그들의 가족들과
사랑했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상한 사람들과 목격하고 경험한 것들 때문에
영원히 일생이 변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사랑과 능력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 끔찍하고 지각없는 행동 때문에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런 참혹한 상황이 송구스럽습니다.
우리는 희망도 없고 어디 하나 기댈 수도 없는 상실감에 빠져 있습니다.
동생은 제가 함께 자라고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이 사람을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항상 가깝고 평화롭고 사랑했던 가족이었습니다.
저희 동생은 과묵했지만 조화를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동생이 그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담당교수는 내가 그 사건을 벌인 사람이 왜 그 사건을 벌였는지에 대해 설명이 없다고, 상업영화 문법에서는 그게 설명돼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상업영화에서도, 작은 영화에서도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의 마음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고 믿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건들이 반복해서 벌어지면서 내 이해의 폭은 넓어졌다. 심지어는 이렇게 사과 성명을 내는 것도,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만큼, 사건들 뒤에 이뤄진 직, 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분석과 되새김이, 수많은 사건 뒤의 결을 다양한 형태로 보여줘 왔다. 지금 이 사과문 전문을 다시 보면서 어떤 구절은 희생자 부모의 마음으로 봤을 때, 엄청나게 상처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면이 눈에 띄는 것도, 반복해서 접한, 비슷한 사건의 분석과 당사자들의 목소리 덕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됐던, 수 클리볼드의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 지금이라면 비슷한 얘기를 쓸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좋은 소재라고 생각하며 졸업작품으로 쓰자고 생각할 만큼 가벼운 마음이 될 것 같지 않다.


네 사람의 대화로 이뤄진 영화가 110분을 넘게 이어질 때, 길고 긴 상영시간만큼이나 답답한 공기가 화면을 뚫고 관객에게까지 뻗쳐 나온다.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와 의사표현, 반대로 부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이 마주 날을 세우고 우뚝 선 울타리만큼이나 서로 뚫고 들어갈 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상황을 고려했을 때, 너무나 이해되는 정경이다.


진정으로는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지만 어떻게든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끝없는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오고자 용서를 말하는 게일은 가슴속 끝까지 꽉 차있는 미움과 증오를 남김없이 긁어낼 태세다. 그것이 자신과 가족을 평생 갉아먹도록 둘 수 없어 발버둥을 치는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용서는 스스로 살기 위해서도 벌어진다. 딱히 종교적인 깨달음이나 울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생존을 위해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상영시간 내내 부적절한 언행의 끝판왕 같은 모습이었던 린다. 심리치료사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한다는 느낌에 계속 그녀가 불편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닌데 왜 그런 역할을 자청할까 싶어서 저절로 고개가 틀어졌다. 그런데 상영시간이 끝나갈 때쯤,  끝까지 무언가를 망설이던  린다를 보면서는 그녀가 육체적인 접촉을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걸음 더 물리적으로 가까워져 상대의 체온을 느끼고 촉감을 느끼며 안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원한다고 느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상념과 후회와 회한들로 둘러싸여, 겹겹이 쌓인 무형과 유형의 벽들에 갇혀 있다가 마침내 누군가와 온전히 닿을만한 기회가 생기자 그녀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손을 내민다. “그 애가 나를 때리도록 뒀어야 한다. 그래서 그 애를 완전히 알았어야 한다” 고 그녀는 말했고, 나는 그저 화면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 영화를 본다는 얘기를 오래 알았던 사람과 나눴을 때, 왜 바꿀 수도 없는 일들에 대해 천작하고 괴로워하면서 봐야 하는 일들을 매번 보느냐고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나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것을 즐기는 악취미가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자신한다. 피할 수 없었던, 교통사고처럼 내 존재를 치고 지나가는 인생의 고통을 넘는 그 모든 시도들을 볼 때, 나는 존재의 경의를 느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만큼이나 더럽고 후비진 외진 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불 수 있는 여유. 방금까지 진흙탕을 우격다짐하며 같이 구르던 옆 사람의 손을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온기를 사랑한다. 총기 소지 합법화나 관련 규정의 재고는 말할 것도 없지만, 타인에 고통에 무감하거나 거리 두지 않는 사회가 될 때, 세상이 차갑고 냉혹한 일들과 멀어져 반대의 방향으로 잔잔히 흘러가리라고 믿는다.





+  게일 역할을  마사 플림프턴은 <허공에의 질주>에서 리버 피닉스와 공연했던 배우. 그와 실제 풋내기 사랑을 나눴던 여배우라고 기억한다. 이렇게 나이 먹은 모습의 그녀를 보는    이상한 기분. 인간의 온기는  마지막의 리버 피닉스와 마사의 일화에도  드러나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해방과 추앙의 환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