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좋다는 드라마가 있어도 방영 중에 따라가지 않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은 완결되지 않는 작품을 하나 둘 따라가다 보면 호흡을 놓치게 되기 일 수고, 완결에 이르러서 실망스러운 마무리를 보여주고 마는 작품이 늘어서 실망을 미리 방지하고 싶은 마음에 또 그렇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완결 이주 전에 시작해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12 화를 따라잡았다. 흡입력만큼이나 극의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특히 궁금하게 만들었던 것은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 때문이었다. 해방이라니, 추앙이라니 무슨 그런 단어들을 현대 극에서 쓰는지 의아했고 또 의아했다. 어떤 맥락에서 저런 단어들을 쓸 수 있는 거야? 하고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시작했다가 추앙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외쳤다. “아하하하하. 와 저런다고? 진짜???” 멀쩡히 그런 단어가 쓰일 거라는 것을 수많은 짤을 통해서 이미 접해놓고도 단어가 등장하는 맥락이나 말해지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현실과 갑자기 동떨어진 느낌에, 그 생경함에 나도 모르게 껄껄 웃으면서 저리 외치게 되더라.
같은 작가의 <나의 아저씨>를 뒤늦게 접했던 건, 그 모든 소란이 잠잠하고도 일 년 여가 지나서였다. 재기되었던 문제들이 얼마나 어이없고 맥락을 모르는 이들이 했던 소리만 요란한 깡통 같은 이야기들이었는지는 금방 등통이 났다. 극 중의 주인공들은 그저 흔치 않은 선함을 간직하고 친절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서로에게 친절을 베푼 이들이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싸웠을 전투들을 짐작 못하는 바도 아니지만 작품 속의 경우는 그와 완전히 달랐다. 사람이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은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니까. 믿어지지 않지만 굳은 마음을 녹일 정도의 온기로 그 어딘가에는 살아있기에, 믿어졌다.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실 너무 불완전해서 서로 부딪히며 밝히는 부싯돌 같은 관계들도 살아가면서 만나는 법이라고. 나는 믿기에. 꿈꾸고 있기에.
죽음의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온다. 그것도 반복해서 나온다. <나의 아저씨>에서 할머니의 염을 하며 눈물을 흘렸던 딱딱하게 굳은 마음의 아가씨를 따라서 나도 참 많이 울었다. 텅 빈 빈소를 커다란 꽃으로, 조기축구회 회원들의 머리로 꼼꼼히 채웠던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외로운 사람을 가만 두고 보지 못하는 연민에 극 중에 인물들에게 나마 감사의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작가가 어떤 죽음과 이별들을 경험해왔는지 몰라도, 인생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는 최악의 이벤트가 어떻게 남은 사람들의 삶의 환기로 이어 붙여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 더 가까이 들여다보게 된다. 치유가 너무 흔하게 말해지는 세상이지만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일러주는 이들은 적다. 나는 이 작가가 그 흔치 않은 사람들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된 참이다.
사랑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한 순간에 내가 외쳤던 외마디 비명과 이해받지 못했다 여겨졌던 순간에 찌르듯 나를 아프게 했던 말들을 두 작품에서 연속해서 만났다. 어쩌면 내게만 있었던 아픈 말들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서로에게 생채기 낼 때 사용하는 언어 들일지도 모른다. 생을 건 사랑을 했던 사람이 승려가 된 절에 찾아가 “불을 질러버리고 싶다” 고 했던 여인과 묵묵히 그 아픈 말을 듣던 사내의 눈빛은 “본능이 살아 있는 여자는 무섭다. 너 무섭다”라는 말을 무조건 좋아하기로 한 사람에게 듣고 만 여인의 그것과 겹쳐진다. 그때 나도 저런 눈빛을 했을까. 금방이라도 울고 싶었던 그런 마음이었으니 아마 그랬을 거다.
‘사실 사건이랄 게 없고 독백의 연속이지’.라고 했던 친구의 말에 백번 공감했다. 극적인 순간과 쫓고 쫓기는 긴장감의 연속이었던 <나의 아저씨>에 비해 이번 작품은 가끔 과하다 싶을 정도의 독백이 순간을 느슨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극은 거의 문학에 가깝게 느껴졌고, 갑작스러운 죽음과 극 중 시간 상의 흐름이 순식간에 함께 흘러 버렸던 예의 그 13화 이후에서는 이대로 어떤 시점에 어떻게 끝나더라도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별다른 사건이 이어지지 않았다. 떨어진 장미꽃의 머리를 찾아내서 붙이던 모습, 애써 다시 꿰려고 벗어낸 코트 단추를 다시 잘못 끼워버리고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웃던 표정, 인공관절을 집 마당 근처에 굳이 묻고 유골함을 열어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재를 찬찬히 살피던 얼굴을 바라보며 자주 문학을 읽는 듯한 감상에 빠졌다.
‘드라마에서 결코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을 말하고 그런 감정을 건드리는 게 신기해’라고 했던 다른 친구도 있었다. 예쁘고 좋은 것들만, 값비싸고 이질 적인 것들만 나열하는 건 극의 미술뿐만 아니라 극의 이야기도 흔히 그렇다. 절절한 연애 이야기에서도 화려한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은 이들이 등장해서 구질구질한 현실과는 여전히 동떨어진 외형으로 아픔을 말하고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는데, 여기서는 망가진 머리에 속상해하고 촌스러운 외향을 지적당하며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해 일단 누구라도 사랑해야 할 것 같은, 사랑이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은 일상의 권태를 말한다. 현실은 권태다. 사실 지겹게도 누구에게도 아무 일도 아무 거대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렇게만 나간다면 극은 극이 되지 못할 거다.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하기로 하는 스스로의 결단이라고. 순간의 감정이나 초반의 설렘이 아니라고. 그런 이야기를 최근에 봤다. <나의 해방일지>의 연미정은 사랑-추앙-을 결단하고, 실천하고, 키워낸다. 누군가를 우러러보고 섬기기로 한 마음에 어떤 일도 위해가 되지 못하도록 기다란 장대를 들고 다퉈 이겨낸다.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 계란 노른자를 감싼 흰자의 인상만 내게 주는, 나의 존재를 밀어내는 도시에서, 타자들을 환대하기를 결심하고, 그 시간들을 몇 초와 몇 분 단위로 늘려나가기를 해내고, 스스로의 마음을 가까스로나마 지켜낸다. 모든 것은 ‘스스로’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사랑의 결단은 나와 상대의 어떤 다름과 장애도 미미하게 만드는 큰 힘을 가졌다.
과거의 사랑의 결단이 지고지순한 무언가 였다면, 현대의 그것은 독립된 힘이다. ‘느림이 배려가 되고, 생각이 깊이’가 되는 마법이다. 극초반 기정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는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현대에 자신이 잘못 태어난 것 같다고, 누군가 정해주던 옛날에 태어났으면 모든 것이 쉬웠으리라는 투정을 할 정도로, 우리 각자가 받아 든 선택지는 너무 방대하고 답을 찾기 어려워만 보인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는데 나는 혼자 동떨어진 것 같고 잘못된 곳에 불착륙한 기분으로 매일을 산다. ‘너를 알아라’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심장을 때린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모두와 같은 누구인 척 연기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선택지에서 나를 잃고 길을 잃기는 너무 쉬워서, 차라리 운명이 돼버린다.
결코 빛나는 자리는 아닐지라도, 자꾸 돌아와서 앉게 되는그 자리를 지키기를. 생각이 계속 머무는 그 사람을 잘 골라내어 손을 놓치지 않기를. 주어진 선택지 밖을 탐험하기로 한, 나를 알기로 결심하고 해방되기를 결단한 모든 이에게 행운이 있기를. 부디 용기 잃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