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phie Jun 04. 2022

순응하는 영혼

네버 렛 미 고

 이 이야기는 내 삶의 BGM 이 될 법하다.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다시 보고 싶다. 이와 유사한 서사나 자장을 가진 무엇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해서 찾아 헤매는 것 또한 자주 있는 일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미래에나 있을 법한 세상의 이야기를 너무나 익숙하고 낡은 풍경 속에서 펼쳐나가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솜씨가 기가 막힌데, 전혀 애쓰는 바가 없다는 양 딴청을 부리고 있는 섬세한 모양새까지 영화와 책 모두 완벽하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어떤 영화들은 다시 보기보다는 재생 버튼을 눌러 놓은 채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싶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밤늦도록 술을 마셔대던 대학 새내기 시절 별로 친하지 않던 여자 선배와 남자 동기 그리고 나는 신촌의 어느 DVD 방을 찾아들었다. 뭐 때문인지 그 동기는 하필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를 골랐고 -제정신으로도 다소 피곤한 영화다- 전쟁의 포화가 빗발치는 와중에 죽도록 피곤한 몸을 휴식시키려고 애쓰는 것이 어떤 일인지 체험하다가 아침을 맞은 기억이 선명하다. 다음날 수강해야 했던 교양특강이 있었어서 그런 짓을 했던 세 사람은 아마 강당 구석에 각자 자리를 차지하자마자 곯아떨어졌겠지. 그 부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말해 무얼 할까. 당연히 <피아니스트>는 내가 말하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영화가 재미없어서 오는 잠을 쫓아내야 하는 영화도 내가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난감하기 때문에 어떤 영화가 내게 그런 영화인지를 열을 세워보는 것으로 구구절절한 설명을 대신하기로 한다.

 <더 셰이프 오브 워터>, <러브레터>, <윤희에게>, <아이 엠 러브>,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일단 떠오르는 것은 여기까지. 곤한 잠을 깨우지 않고, 갑작스러운 큰 소리로 놀라게 하지 않으며 적당한 높낮이를 가진 배우의 읊조림이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영화가 적당하다. 아주 가끔, 적당한 볼륨으로 화면을 조절하고, 이 영화들의 세계 한편에서 깨어나는 깊은 꿈을 꿀 수 있기를 기대하며 잠을 청하곤 한다.


  <네버 렛 미 고>의 세계는 무해한 주인공들과 함께 꿈속을 헤매고 싶은 세계 중 하나다.  아니. 사실 캐시와 토미, 루스는 무해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계는 해로운 세계가 맞다. 원형이 된 사람들이 나이 들고 병들어 갈 때, 그들에게 동일한 거푸집에서 탄생한 스스로의 몸의 조각들을 하나씩 내어 주며 생명의 빛이 꺼질 운명에 처한 사람들. 얼마나 많은 복제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성은 알파벳 대문자가 대신하고 있고, 적절한 성경험은 장려되지만 소녀들은 나면서부터 아이를 가질 수는 없는 몸이다. 호기심에라도 담배를 피우는 것은 해악 중에서도 최고의 해악이 돼버리고 교내에서는 금기를 넘은 이들에게 벌어졌다는 일들에 관해 각종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충격적인 세계관에 놓인 이들이지만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이곳과, 그렇게 다른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자라나는 동안 그들은 헤일셤이라는 나름의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보호받으며 자라나지만, 그들에게 자라서 ‘어른’ 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아는 자유는 일부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가끔 눈이 밝은 이가 이들에게 진실의 조각을 어렴풋이 흘려주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의 캐시는 낡은 인형을 품에 안고 의미 모를 노래를 자신의 해석을 담아 흥얼거리며 눈을 감는다.  그녀는 깨닫지 못할지라도, 주어지지 않을 미래의 자신. 연인 그리고 그녀가 영원히 갖지 못할 아이가 노랫말에 투사되어 있다. 그런 그녀의 백일몽을 엿보는 이의 가슴은 제 아무리 편견으로 딱딱하게 굳었을지라도, 이내 슬픔으로 녹아내리고 만다.


 이토록 무해한 나의 주인공들은 나이가 들어 미처 완연한 어른이 되기 전에, 본래의 용처대로 쓰여야 한다는 체계의 구조에 순응한다. 그들은 이 불합리한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를 전복하려는 생각이 도무지가 일도 없다. 그리고 그런 이들이 저지르는 악행이라야, 모두가 떠나버려 혼자 남을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두려움에 굴복해 버리고 마는 것. 그 공포에 압도당한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속절없이 끌리는 연인 사이에 끼어들어 떼어놓기 정도가 다다. 내 생각에 나는 이보다 더 한 짓을 남들에게 수도 없이 한 것 같은데 루스는 죽음의 순간에 그녀가 갈라놓은 연인을 회복시키려는 희망을 품는다.

  어쩐지 뭔가를 예감하는 듯한 캐시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쇠약해진 토미가 마담의 집, 낮은 철문 앞에서 서로를 의지한 채로 망설이는 순간에 다다르면 내 심장으로부터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실제로 아무 권한 없는 이들 앞에 간절히 두 손을 모으고 선 두 사람이 바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저 운명의 유예다. 진정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온 몸을 떨며 그들이 내민 것은 소박한 창조물들이다. 텅 빈 손이 만들어낸 그림들이 사랑의 진실됨을 증명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처연한 사람들.  사랑의 증명이 아닌 겨우 영혼 그 자체의 존재 여부의 파악을 위해 세상이 예술을 요구했었음을 알고, 그들은 절망한다.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예술로써 증명될 거라고 믿는 어리석음은 하루 이틀, 몇 사람의 일이 아니다. 맹목적인 믿음 때문에 다치는 사람들을 분명 알 것 같어서, 어쩌면 이들이 무해하다는 처음의 생각은, 이제와 보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스스로를 해치는 것도 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니 말이다.

 유행하는 최준 영상을 자주 봐서 그런지 고약한 농담이 자꾸 머릿속에 맴돈다.


“철이 없었죠. 사랑을 그림으로 증명한다는 자체가...”


   글을 쓰고 영화를 보고 그런 것들이 곧 세상을 살아갈 힘이 될 거라고 믿으며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나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무게에 대해 잘 몰랐던 것 같다. 뭐 그렇다고 지금은 더 잘 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무언가를 끄적이고 만들어내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이 모든 시간들이 나라는 사람을, 우리의 간절함을 증명해줄 거라고 믿었던 순진한 소망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이 타고 남은 재라도 내 안에 따뜻한 온기는 여전하고 그것에 감사한다. 그보다 훨씬 더 사소한 일로도 삶의 열기가 꺼져가는 것들을 자주 목도하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 시절에 우리들은 글자들이 무엇을 증명한다고 믿었던 걸까. 나는 왜 그 세월을 보내고 전혀 상관없는 길의 한갓진 곳에 멈춰 서서 이따금 뒤를 돌아보게 될까. 예술하기에는 좋아도 몸과 마음에 건강에는 일도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을 여전히, 자주 매만진다.


 요즘은 특히, 사람들을 지켜주고 그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역할을 하며 조금씩 그 일이 자신에게 잘 맞다고 여기는 캐시를 볼 때, 들판을 달리며 자신과 가까운 익숙한 무언가를 허허벌판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녀를 보며 자주 나의 직업적 쓸쓸함이나 생활을 떠올린다. 매일 울고 웃으며 보던 얼굴들이 바로 내일 갑작스럽게 사라질 수 있다는 현실에 대한 직시를 게을리했다가는 마음이 단박에 산산조각 날 수 있는 일이 나의 일이니 말이다.


  인간의 건강한 몸과 정신이 작은 조약돌 하나로도 벼랑 끝에서 밀려 떨어질 만큼 유약하고도 유한하다는 진리를 매번 체험하는 순간들. 지금의 나의 젊음에 감사하는 일과 곁에 있는 다정한 이에게 내가   있는  제일 다정한 사람이 되는 일을 미뤄서는  된다 다짐하는 그런 하루가 무수히 쌓여간다.


(2021년 3월 10일)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