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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Jun 04. 2022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서

<드라이브 마이 카>

하필 지금 이 순간 만나게 된 영화여서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 영화가 엄청난 흡입력으로 나를 사로잡은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의 섭 콘텍스트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세헤라자드>, <기도>, <드라이브 마이 카> 까지 순식간에 씹어 삼켜버리고 싶어 버렸던 것을 보면 말이다.


담겨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아 소화가 벅찰 정도였다는 것이 놀랍지 않다. 구석구석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은 영화일 수밖에 없던 것이 이 복잡하게 아름다운 패치워크를 구성하는 조각 천 들, 연극과 소설 모두가 깊게 파고든 저마다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 삼킨 배를 두들기며 비로소 안다.


연극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게 된 카후쿠는 이년 전 사랑하는 동료이자 아내를 잃었다. 각각의 배우들이 한국어와 일본어 심지어는 수화 등의 다양한 언어로 구성된 연극의 워크숍은 지루할 정도로 느리게 이어진다. 감정을 싣지 말고 대사를 하라는 카후쿠에게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배우들은 불만족을 표현하지만 개중에는 완전히 다른 언어로 된 상대의 대사까지 온전히 공부하고 제대로 리액션해야만 하는 방식에 대해, 그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지는 -진정한 소통에 가까운- 대사의 주고받음이 이뤄지는 방향성에 대해 깊이 감동하고 동의하는 이도 존재한다.


아내는 아름다운 이였다. 그녀는 소리라는 뜻의 오토라는 이름을 가졌고, 성스러운, 혹은 집이라는 뜻을 가진 성의 카후쿠와 결혼하면서 ‘성스러운 소리의 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We shall hear the angels”

바냐 아저씨, 안톤 체호프



오토가 녹음한 <바냐 아저씨>의 대본을 그녀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낡은 사브의 카세트 플레이어로 매일 들으며 대사를 주고받는 것이 카후쿠 생활의 전부다. 그녀가 쓰러져 있는 집에 도달하기 전, 그는 연극의 마지막에서 이어지는 소냐의 저 예의 독백을 막 듣고 난 참이었다.



분명 카후쿠와 아내는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복잡한 것이었다. 딸을 잃은 지 이십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둘은 상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교묘히 피해만 간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 에서는 아내가 아이를 잃고 난 다음부터 다른 남자들과 정사를 나눴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대사는 없다. 그저 교묘히 둘 사이의 분열의 중심을 피해 가는 두 사람이 간간히 평행선을 그리는 듯이 보일 뿐이다.


아내가 정사를 나누던 배우 중의 하나인 다카츠키에게서 둘 만의 특별한 교감이라고 믿어왔던 ‘서사’의 나눔이 더 나아가곤 했다는 것에 카후쿠는 뒤늦게 충격을 받고 그제야 깊이 상처받았던 자신에 대해 인정하기 시작한다.



“기노는 그 방문이 자신이 무엇보다 원해왔던 것이며 동시에 무엇보다 두려워해 왔던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다. 양의적이라는 건 결국 양극단 중간의 공동을 떠안는 일인 것이다. ‘상처받았지, 조금은?’ 아내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인간이니까 상처받을 일에는 상처받아.’ 기노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반은 거짓말이다. 나는 상처받아야 할 때 충분히 상처받지 않았다. 고 기노는 인정했다. 진짜 아픔을 느껴야 할 때 나는 결정적인 감각을 억눌러버렸다. 통절함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진실과 정면으로 맞서기를 회피하고, 그 결과 이렇게 알맹이 없이 텅 빈 마음을 떠안게 되었다. 뱀들은 그 장소를 손에 넣고 차갑게 박동하는 그들의 심장을 거기에 감춰두려 하고 있다.”

기노, 여자 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카후쿠는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대해도 일도 이상하지 않은 다카츠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공정하게 대하며 그가 인간으로서, 배우로서 가진 단점도 장점도 바로 보았지만 정작 자신과 아내와의 관계에 대한 성찰은 다름 아닌 일견 인생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고 보였던 그에게서 얻었다.


다카츠키는, 그리고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 는 정중하지만 날카롭게 지적한다. 세상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진정으로 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사람은 누구나 맹점을 가졌고, 그것은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단지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봄으로써 상대를 일부 알 수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한다. 자기 것으로 가질 수도, 알 수도 없는 상대를 보내고 인격마저 산산이 부서진 다카츠키에게서 나올 수 있던 성찰인가 싶지만 어쨌든 그렇다.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싶던 깊은 애모의 대상을 잃고 끝내 자신까지 잃어버렸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 여자 없는 남자들, 무리카미 하루키


다카츠키의 고백으로 타격을 입은 게 분명한 카후쿠에게 그때까지 카후쿠의 낡은 사브를 존재감없이 묵묵하게 운전하는 데에 그쳤던 와타리는 묻는다. 그저 아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지를 격앙된 톤으로 묻는다. 그녀가 당신을 사랑하고, 그러고도 동시에 다른 남자들과 잤던 것이 자신에게는 결코 서로 충돌하는 일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녀는 단지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라고. 와타리는 오토의 목소리로 카후쿠를 흔든다.


연극에 참여한 여러 배우들 중에 카후쿠의 연출 의도를 제일 잘 알아주었던 이는 역설적이게도 외국에서 온 무용수 출신의 수화 사용자다. 뱃속의 아이를 잃고 난 슬픔으로 춤을 추는 것을 멈춘 그녀는 소냐를 연기하게 됐다. 다카츠키의 갑작스러운 낙오로 원치 않게 바냐를 연기하게 된 카후쿠를 뒤에서 꼭 끌어안고 그의 가슴 앞에 소리 없는 수화를 내보이며 한없이 다정한 저 마지막 독백을 한다.



“바냐 아저씨, 살아가요. 길고 긴 낮과 밤의 연속에서 끊임없이 살아가요. 운명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시련을 우리 참고 견뎌 가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고 나이 든 후에도 계속 쉬지 않고 남들을 위해 일하도록 해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의 때가 오면, 그땐 죽어서 편하게 무덤 저편에서 우리네 인생이 괴로웠던 것을, 울었던 것을, 고통받았던 것을 비로소 신께 토로하도록 해요. 그러면 신께서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겠죠”

바냐 아저씨, 안톤 체호프  *한글대본 참고로 의역함


그렇게 카후쿠의 서럽고 어두웠던 밤을 채웠던 독백은 그녀의 수화로 어떤 부드럽고 따뜻한 것으로, 위로로 승화된다.

운전 영재 와타리의 거의 부당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자기 대우도 카후쿠의 상처 인식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그녀가 자신과 상처를 준 대상을 용서하고 행복하기를 순수하게 바라게 되는 카후쿠가 자기도 모르게 소냐와 같은 대사를 하며 와타리를 안아줄 때, 첫 관람에서는 무리수라고 보였던 감정이 재관람에서 다르게 보였다.


서로 비껴나가는 소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나마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따뜻한 일들이 영화에서도, 삶에서도 감히 지치지도 못하게 계속해서 벌어지고 흐트러진다. 자신이 그 자신의 입으로 서술한 놀랍기 그지없는 서사도 다음 날이면 새까맣게 기억하지 못하던 오토와 그녀의 이야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받아 적고 복기하던 그녀의 남자들. 그들과 그녀의 끝없고 불분명한 시도처럼, 와타리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엄마를 추억하며 매번 다시금 상처받았던 것처럼, 인간들은 한계가 분명한 자신만의 맹점을 갖고 타인을 이해해보려는 부질없고 대가도 없는 시도들을 한다. 그리고 살아간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무모하고 빛나는 모든 시도들을 다시금 따뜻하게 어루만지게 한 영화였어서, 나는 이렇게나 열심히, 부지런히 느끼려 했나 보다. 절대 부질없지 일만은 아니라고, 살아가며 노력할만한 일이라고. 상처받으면서도 무한정, 끊임없이 시도하고 넘어져 볼 만한 일이라고. 어쨌든 마지막 날, 우린 이 모든 것을 편히 쉬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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