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극복하는 힘에 대하여
실습 일정 중 요양원에서 만난 할머님 중 한 분은 몸의 기능과 인지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 상태에서도 스스로 식사하기를 고집하신다. 일손이 떨어지는 와중에 그런 고집은 고마운 고집이지만은 문제는 그 스스로의 식사에 특별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할머니는 모든 음식을 다 섞어서 드신다. 그렇지 않아도 소화기능이 떨어져 있는 탓에 모든 음식이 곱게 갈아져서 죽 형태로 나오는데, 그 모든 메뉴를 본인이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컵에 담아 드려야 비로소 잘 드시는 것이다.
처음에 요양보호사가 만들어준 짬밥(?)을 좋아라 드시는 할머니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새로운 고용인 앞에서 곱게 비벼드리기를 주저 않는 것은 되려 내가 되었다. 잠시 잠깐 그들은 충격받을지 몰라도 이내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할머니가 기뻐서 표정 없는 얼굴에 표정을 그리시며 숟가락질을 시작하시기에.
언젠가 스스로 먹기를 고집하는 할머니에게 짜증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사람 뒤에 가만히 다가가,
“강하고 독립적인 그런 네가 좋아”
라고 했을 때, 말도 못 하시는 와중에 환하게 웃으시며 뺨을 비비고 키스를 해주시던 그녀를 나는 오래도록 잊지 못할 거다.
할머니의 사연을 들은 것도 이 독특한 식습관과 관련해서였다. 할머니는 영국에서 오셨고, 2차 세계대전을 겪으셨다. 전쟁통에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서 음식을 낭비하는 것을 큰일인 줄 알며 성장하신 탓에 생긴 독특한 습관인 것이다.
엉뚱하게 할머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오랜만에 넷플릭스에 업로드된 <해리포터> 후반 시리즈를 보면서부터이다. <다키스트 아워>의 닭살이 돋아나는 큐브 씬이나 <덩케르크>의 국뽕 가득한 내러티브, 많은 공통점과 대놓고 가져온 오마쥬가 여기저기 산재한 <반지의 제왕>를 제외하더라도 <해리포터>의 후반 시리즈가 주는 감동은 각별한 것이다.
승전 등의 눈에 보이는 이득을 생각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싸워본, 운이 좋게도 결국에는 승리하고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국의 역사에 있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더해서 이번에 새삼 깨닫고 만 이 이야기의 독특함은 ‘슬리데린’의 존재다. 모두가 착하고 선할 것 같은 호그와트라는 집단에서 여전히 자기가 맡은 악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슬리데린을 그러나 호그와트는 결코 끝까지 외부의 세력으로 치부하거나 내치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중 하나고 우리 내에는 그런 악도 명백하게 존재한다.
시리즈 후반은 전반적으로 지독할 정도로 암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죽어나간다. 죽음을 맞이한 자의 얼굴을 화면 가득 채우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 떠는 사람들의 눈물을 가감 없이 관객에게 보인다. 가장 희망 없는 곳에 서 희망을 발했던 네빌을 필두로, 희생은 꼭 지켜져야 할 가치를 위해 빛을 발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결코 우쭐해하지도 자만하지도 않는다. 왜냐면 아군과 적군에 상관없이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저 아파야 할 것들을 감내하고 딛고 일어설 힘을 서로에게 북돋는다. 승리의 경험이 역사에 있었기에 이런 서사가 가능한 것이라면 슬픈 일이겠지만, 결과야 어쨌든 숭고한 가치가 있는 그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감동이란 것에는 의견이 없다. 이러한 서사를 싸구려 감성팔이가 아닌, 진심 가득 담아 만들 수 있는 사회가 부러운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 이번에 눈에 띈 구절들은, 해리와 루나가 세스트랄을 두고 나누는 대화다. 기억할지 몰라도, 세스트랄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직접 겪은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신비한 동물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겪어봤다는 동질감이 두 사람을 강하게 엮는 이 장면에서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공감을 느꼈다. 개인적으로는, 해리와 루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만한 큰일이 닥친 요즘에 들어서 더 각별한 장면이다.
아직은 이 ‘죽음’에 대한 대화에 임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가 내게 있다. 어떤 이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오히려 나보다 더 할 말을 찾지 못해 한다. 어떤 이들은 애써 화제를 전환하려고 애쓰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괜찮아 질거라 대략 짐작하는 눈치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그들이 가졌던 상실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얘기한다. 내가 이전에 그들에게서 본 적도 없는 톤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나의 슬픔을 그들의 슬픔으로 나눈다.
나는 내가 가지게 될 이 크고 회복되기 불가능한 상실의 경험으로 나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나는 감당하기 힘든 슬픔을 짊어진 사람들과 전에는 주지 못했던 마음으로 같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내가 가지게 될 그 무엇보다 값진 삶의 마법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여전히 살아갈 것이다.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만이 상실의 경험은 아니다. 때때로 개인은 약해질 수 있는 만큼 강해져야만 하고 그 약하고 강해진 모습으로 비슷한 모습을 했었고, 하게 될 사람들을 더 온전히 알게 될 수 있다.
(2020년 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