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아도 여행은 여행

김영하, <여행의 이유>,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by 백소피
2005년 12월의 어느 날, 나는 상하이 푸둥공항 티켓 카운터에서 서울로 가는 편도 항공권을 사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여행자는 공항에서 항공권을, 더더군다나 편도는 사지 않는다. 터무니없이 비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추방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앤이 죽고 난 뒤, 나를 위로한 건 해가 완전히 저문 뒤에도 여전히 푸른빛이 남아 있는 서쪽 하늘, 쇼핑몰에서 나이 많은 여자들을 스칠 때면 이따금 풍기던 재스민 향기, 해마다 7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앤의 생일인 24일, 신발가게에서 유독 눈이 가던 치수 6.5,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누를 수 있는 앤의 휴대폰 번호 열 자리 같은 것들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 늘 거기 남아 있는 것들, 어쩌면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지구에 남아 있을 그런 것들에게서 나는 위안을 얻었다. 그런 것들 중 하나가 교정 한쪽에서 서 있던 레드우드 한 그루였다.
- 김연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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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이다.

직장을 나오면 휴가철은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 시기는 피하게 된다.

올여름은 바캉스 대신 북캉스를 즐기기로 했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작가가 떠난 여행지 소개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를 탐구한다. 그에게 여행은 소설과 닮았다. 설렘과 흥분을 가지고 낯선 세계로 들어가 천천히 알아가다가 안전하게 원래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점이 닮았다고 말한다.


나는 여행을 하는 순간에도 여행을 꿈꿨다. 늘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어찌 보면 여행을 좋아한다기보다 한 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서라는 이유가 더 크다.


왜 그럴까?

흔히 말하는 역마살?

지금까지 살면서 안정감을 느끼는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안정감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떠나려는 아이러니한 감정이 내 안에 있다.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의 첫 문장은 길다. 위에 쓴 문장이 전부 하나의 문장이다.

늘 짧은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이 있었는데 김연수의 긴 문장을 보고 단순히 문장의 길이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김연수의 소설 속 주인공 카밀라는 입양아로 키워준 엄마 앤이 죽고 나자 친모를 찾아 나선다. 카밀라는 어린 시절의 흔적이 담긴 상자 속 물건을 하나씩 꺼내보며 글을 쓰기 시작한다. 추억의 물건으로 여행을 떠난 그녀는 급기야 친모의 흔적을 찾아 한국에 온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뭐니 뭐니 해도 현재를 잠깐 치워놓을 수 있다는 거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운이 좋으면 내가 변해 있을지도.


김영하는 "여행이 곧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라고.


카밀라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여행을 통해 카밀라에서 '희재'가 된다. 진정한 자신을 찾은 것이다.

김영하는 여행을 하는 중에는 무언가를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돌아온 뒤에야 천천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여행은 추억을 남기려고 가는 것인가.


여행지에서 아무리 나빴던 기억도 지나고 나면 모두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된다.

지나간 내 삶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럴듯하게 기억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행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살 만한 삶이었다고 느껴지게 만든다.


나는 또 여행을 갈 것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여행을 간다.

지금 이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서 떠나는 것은 그만하련다.

돌아오는 곳은 지금 '이곳'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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