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라는 이름의 패러독스

자크 데리다, '용서하다', 이숲, 2019

by 백소피

용서, 불가능과 가능의 무한성

이 책의 제목이 '용서'가 아니라 '용서하다'이기 때문에 '하다'라는 의미를 생각해 봤다.


나는 살면서 몇 번의 용서를 '할' 일이 있었나?


곰곰이 생각해 봤다. 또, 나에게 용서를 '구한' 사람이 있는지도 떠올려 봤다. 장켈레비치는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용서는 끝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용서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용서가 끝난 것으로 보이는 곳, 불가능해 보이는 곳, 바로 용서의 역사와 용서의 역사로서의 역사가 마지막에 다다른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용서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어떤 지점에서 시작되든 '용서'는 불편하다. 용서의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관없이 '용서'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가 불편하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 내가 유난히 양심적인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용서할'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말처럼 "용서의 본질이 바로 시간, 과거에 대한 반박 불가능성과 수정 불가능성을 내포한 시간의 존재"이기 때문에, 외면해도 용서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용서의 무한성과 초자연성을 믿는다는 데리다의 말에 일정 부분 동감한다.


데리다가 정의하는 용서의 본질은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다. 그는 또 "용서가 불가능한 것, 근본 악의 괴물성과 맞서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이런 논리라면 대체 용서가 가능하기는 한가? 마치 '용서'라는 이데아, 혹은 이상향을 만들어놓고, 결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어떤 경지를 끝없이 갈망하라는 의미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강남순 교수('용서에 대하여', 동녘, 2017.)는 "데리다는 무조건적인 용서, 그 용서의 불가능성을 강조함으로써 단지 용서의 실천적 행동을 마비시키려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조건적 용서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지속적 절충과 확장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라고 했다.


강 교수는 사과나 뉘우침 등 전제조건이 붙은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데리다의 말을 언급하며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구나 용서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일상에서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용서를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존재가 어떻게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을까?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할 수 있다면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데리다라면 바로 이런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 인간과 신의 '경계'에 관한 것이 용서에 관한 모든 토론이라고 할 것 같다.


윤리적 덕목으로서의 '용서'

강남순 교수는 저서 <용서에 대하여>를 통해 데리다의 다소 모호하고 불친절하기까지 한(!) 용서에 대한 논의를 비교적 알기 쉽게 해석했다. 그는 "용서란 상처 입은 피해자가 보이는 윤리적 반응이다. 용서는 분노의 감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인간의 도덕적 의무이자 윤리적 반응이어야 하며, 가해자인 타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나는 오히려 그 가해자에 대한 감정이 없어야 진정한 용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연민의 감정을 가진다면, 과연 그 감정만 느낄까?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히 한 가지로만 이루어지기 어렵다. 연민이 뭔가?

강남순 교수의 책에서는 나와 있지 않다. 종교적인 의미의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뜻이라면 그 또한 오만한 태도가 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차라리 용서의 대상자가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가지라는 게 더 설득력이 있다. 적어도 용서하지 않으면 영원히 고통받을 자신에 대한 연민 말이다.


자기 연민은 동전의 양면처럼 자기 용서와 맞닿아 있다. 누군가를 용서 '하는' 행위를 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용서가 '자기 용서'가 아닐까. 당시의 피해자였던 나에 대한 분노가 아직 남아 있다면 자신부터 용서해야 한다. 용서를 구하는 것도 받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내가 여러 갈래이듯 용서도 한 가지가 아니다. 분노와 용서가 공존할 수 있는 것도 이런 구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용서하는데 어찌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할 수 있으며, 설사했다고 한들 정말로 용서한 건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나 자신만이 알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용서를 받는 대상자는 별 의미가 없다. 이때부터는 용서의 대상자가 아니라 나 자신과 용서, 주체와 객체 사이의 문제가 될 뿐이다. 이런 상태가 되려면 데리다의 말처럼 용서의 윤리에는 어떤 위계주의도 작동해서는 안 된다.


용서와 감사, 혹은 위증

만약 내가 데리다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 -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를 했다고 치자. 내가 위증하는지 아닌지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알 수 있는 건 온전히 "용서했다"는 나의 말뿐이다.


"용서하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라서 어떠한 권력이나 상대방의 참회 따위도 개입하면 안 된다. "용서하다"의 주체는 나 자신과 그 상대방이 아니라 나와 나의 위증 혹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한 타인의 이름으로 용서할 운명에 놓였다. 왜냐하면 모든 잘못이나 악은 우선 위증이다. 그조차 용서하면서 위증할 위험을 무릅쓰고, 용서하면서 배신할 위험을 무릅쓴다. 끊임없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언제나 용서한다.


용서가 이렇게까지 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대체 왜, 용서를 생각해야 하나?


인간은 누구나 구원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 혹은 안식 말이다. 용서의 가해자건 피해자건 어느 쪽이든 이것을 짊어진 채로는 마음의 안식을 얻기 힘들다. 마음의 짐을 덜고 행복해지기 위해 용서가 필요하다. 인간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아무 일 없는 듯 무시하고 살아가도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용서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증거이다.


데리다의 "용서하다"에 관한 논의는 용서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에 앞서 우리가 과연 어떤 용서를 해야 하는지,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를 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용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당사자가 아닌 용서의 상대방 조차 침범할 권한이 없다. 대다수의 사람이 용서를 할 만한 일이라도 당사자가 도저히 할 수 없다면 없는 것이다.


용서를 하면 잊게 된다. 용서를 하지 않아도 잊을 수는 있다. 마음의 상처는 망각보다 오래간다. 나는 X를 용서했을까? 엄마는 자꾸 잊어버리라고만 한다. 잊어버리려 한다고 해서 그렇게 맘대로 잊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잊으려고 애쓸수록 더욱 의식하게 될 뿐이다. 잊는 것보다 용서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


아직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한 용서보다 나 자신을 용서하는 게 더 힘들다. 지난날 잘못된 선택과 행동에 대한 후회, 자책감이 더 크다. 그는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더 탓할 것도 없다. 하지만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지난 일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자기 불신이 크게 남았다. 과거의 나 자신을 용서하면 또 망각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까 봐 못하겠다. 그대로 안고 가기엔 너무 벅차다. 감정 낭비다.


결국 나는 어떻게는 내 식대로 나를 용서'해야' 한다. 과거를 그대로 인정하고, 지난 일에 대해 객관적으로 마주하는 것. 그게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의 용서'하기'는 여기서부터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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