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다이어트를 시작했나
나이의 앞자리가 바뀌면서 본격적으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코로나에 걸려 낫자마자 다시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한 달 내내 달고 살았다. 어찌나 기침을 해대는지 기침할 때마다 갈비뼈가 아파서 내 몸을 끌어안아야 했다.
그렇게 식겁했으면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는데 역시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게 되면서 강제로 맞춰지던 12시 점심식사는 옛말이었다. 식사는 배가 고플 때 먹었고, 배가 고프지 않을 때도 먹었다.
나 : 밥을 먹었는데 고픈 건 왜지? 분명히 배가 부른데 말이야.
용주부: 허위 경보야. 근데 나도 배고파.
나 : (배달 앱) 빨리 안 켜고 뭐 해?
밤마다 우리의 대화는 배달 앱을 켜서 무엇을 먹을지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는 것으로 끝이 났다. 먹는 것에 누구보다 진심인 용주부는 음식에 모험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단골 메뉴의 가게를 정해두었다. 그래봤자 맨날 햄버거, 피자, 후라이드 치킨, 양념 치킨, 그 외 치킨...
2인 가구의 평균 식비가 4인 가구를 훌쩍 넘었다. 원 없이 먹었다는 포만감도 들지 않았다. 무엇을 먹을지 결정하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하면 그날 기분은 좋았고, 그렇지 못하면 하루가 찜찜했다.
뭐가 먹고 싶어?
용주부가 나에게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었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준비하는 것이 용주부에게는 최대의 과제였다.
그런 용주부에게 두 번째 위기가 닥쳤다. 첫 번째 위기는 둘 다 성인병 진단을 받고 약을 먹게 된 것이다. 그땐 며칠만 심각하게 생각하다가 약 먹는 일이 일상이 되자 또다시 예전으로 돌아갔었다.
두 번째 위기는 불가항력적이었다. 용주부는 알 수 없는 고열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한여름은 가장 가혹한 계절이었다. 며칠이면 퇴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입원이 일주일을 넘길 조짐을 보이자 견딜 수 없어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용주부는 이틀 만에 병원식을 못 먹겠다고 난리를 쳤고, 병원 안에 식당도 없어서 끼니를 챙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6인실에서 에어컨 리모컨을 맘대로 조절하는 앞자리 빌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통원 치료를 조건으로 겨우 퇴원해서 한숨 돌릴 줄 알았는데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여름 내내 집 밖을 나가지 않던 우리는 9월이 되자 아무 근거도 없는 새로운 변화를 예감했다.
그때부터 우리의 다이어트 식단이 시작되었다. 거창한 선언이나 비장한 각오 따위 없었다. 그전에도 몇 번이나 다짐하고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각오를 다지면서도 스스로 믿지 못하는 신기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용주부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챗 지피티와 뭔가 이러쿵저러쿵하더니 잠이 덜 깬 내 앞으로 체중계를 가져왔다.
나 : (게슴츠레한 눈으로) 뭐야 이게.
용주부 : 자, 나의 몸무게는 현재 OO이야. 이제 그만 공개해. $$ 맞지?
나 : (뜨끔해하며) $$ 아니거든!
용주부 : 그럼 보여줘. 아님, $$ 으로 알고 식단 짤 거야.
나는 결국 결혼 삼 년 차에 몸무게를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발끈해서 올라간 체중계는 내 몸무게에 발끈했는지 용주부가 예상한 $$ 보다 더 나가는 기염을 토했다!
나 : 어어?! 이거 고장 났다.
용주부 : 아니야.
나 : 에잇! 아침부터 험한 것을 봤다.
용주부는 나의 절규를 뒤로하고 컴퓨터로 가서 "OO이 몸무게 ##"이라고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며 챗 지피티에게 고자질했다. 그날부터 메뉴가 달라졌다.
보통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삼시 세 끼를 챙겨 먹기가 힘들다. 아침을 먹으면 시간이 어중간해서 점심을 먹을 수가 없고, 점심을 늦게 먹으면 저녁이 아닌 야식 시간이 돼버린다.
하루 세끼를 안 먹으면 되지 않냐고?
나는 그렇게 먹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용주부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나에게 치명적인 습관이 있었으니 바로 과자나 라면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불규칙한 수면 습관까지 있었으니 성인병에 비만인 몸뚱이를 갖게 되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삶은 계란 한 알, 사과 반 쪽, 방울토마토, 아몬드, 무가당 두유를 먹었다. 아몬드는 원래 10알 씩이었는데 망할 지피티가 나에게 두 알이나 뺏아갔다. 방울토마토나 포도는 있을 때만 먹고 늘 먹는 건 아니었다.
이렇게 아침을 먹으니 자연스럽게 점심을 기다리게 되었다. 오랜만에 직장인과 같은 심정으로 점심만 기다렸다. 처음엔 점심을 일반식으로 먹다가 지금은 점심도 가볍게 먹는다.
점심은 삶은 계란 한 알, 삶은 고구마 반 개, 견과류, 우유 반 컵이 전부다. 분하게도 이것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내가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사람이라 견딜만한 것이다. 절대 따라 하지 말길 바란다.
점심을 일반식으로 먹고 저녁을 다시 다이어트 식으로 먹을 때는 이렇게 먹었다.
삶은 닭가슴살 한 덩이를 소금 간 한 올리브유에 찍어먹고, 삶은 단호박 몇 조각에 채소를 곁들여 먹는다. 닭가슴살을 삶아도 그 특유의 뻑뻑함은 어딜 가지 않아서 로메인이나 상추에 싸 먹어야 그나마 넘어간다.
나는 용주부가 며칠 하다 관둘 줄 알았다. 이 식단에 불만은 없었다. 장단점이 너무나 뚜렷한 식사여서 그렇지. 무엇보다 간편해서 좋았다.
더 눈에 띄는 변화는 몸무게였다. 일급비밀이던 몸무게를 공개한 후로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몸무게를 쟀다. 항상 외면하던 몸무게를 매일 재고 조금씩 줄어가는 체중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항상 더부룩하던 속도 저녁을 일찍 먹고 집에서 만든 것으로만 먹으니까 덜 부대꼈다.
나 : 생각보다 할 만 한걸? 왜 진작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의지가 없어서 아님 게을러서?
용주부 : 둘 다지.
나 : 근데 왜 갑자기 다이어트 식단이야?
용주부 :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어서.
모범 답안 같은 용주부의 대답에 수긍하려는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꼬르륵 소리만큼 살이 빠지는 거라고 되내며 매일 아슬아슬하게 참는다. 수없이 유혹에 굴복할 뻔했지만 서로가 있어서 참을 수 있었다.
"너 때문에 다이어트 실패했어"라는 원망을 듣기 싫은 우리는 절대 먼저 뭘 먹자고 하지 않았다. 몇 번씩 용주부가 몰래 배달 앱을 켜고 그림의 떡을 구경하는 것을 못 본 체했다.
놀랍게도 우리는 이런 식단을 한 달째 이어가고 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절제된 식사와 규칙적인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저 얼마 되지도 않는 식사를 놓치지 않으려면 제때 일어날 수밖에 없다. 배가 고파서 아침에 알람이 없어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밥 먹으려고.
아직 빠진 살 보다 빼야 할 살이 산더미지만, 용주부의 다이어트 식단 덕에 기분 좋은 고통을 즐기는 중이다. 그는 조금이라도 맛있게 먹기 위해 제한된 조건에서 최대한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냈다.
적어도 일 년은 이렇게 먹어야 20대의 몸무게로 돌아올 수 있을 텐데 별로 걱정은 되지 않는다. 용주부가 있으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배가 고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