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치 또띠아
본격적으로 다이어트를 시작한 지 어언 한 달 차, 나는 3.2kg이 빠졌고 용주부는 7kg 가까이 빠졌다.
기대한 만큼 빠지지 않아서 살짝 실망했는데 이 정도면 건강하게 빠지는 거라고 했다. 맨날 다이어트를 입으로만 했지 한 번도 본격적으로 해 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되고 있는 건지 헤갈렸다. 다행히 용주부가 있어서 이런 오락가락하는 나의 마음을 잘 잡아주었다.
용주부는 학창 시절 육상 선수일 정도로 운동신경이 뛰어나다. 물론 지금의 몸으로는 택도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나와는 기본적인 체력이 다르다.
애초에 용주부가 된 계기도 내가 한 끼 요리를 하고 나면 지쳐서 아무것도 못할 만큼 쓰레기 체력인 것도 한 몫했다. 남편도 처음엔 내가 엄살인 줄 알았다.
워낙 엄살쟁이로 찍힌 것도 있고, 겉으로 봐서는 전혀 약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어렸을 땐 젓가락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가냘펐다고 항변해 본들 증거로 들이밀 만한 사진이 없으니 믿게 할 도리가 없다.
그러나 매끼 식사를 챙기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알게 된 남편은 몇 번의 개싸움 끝에 자신이 하겠다고 특단의 조치를 내렸더랬다.
그때부터 용주부는 웬만하면 직접 요리 했다. 역시나 몸으로 하는 일의 습득이 빠른 그 답게 용주부 노릇도 하면 할수록 숙련도가 올라가 둘 다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용주부에게 다이어트는 첫 번째 시련이었다. 무엇보다 먹는 것에 진심인 그가 다이어트를 결심한 것도 놀라운데 이제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라 다이어트 식단을 짜야하니 더 골치가 아팠다.
나 : 다이어트 식단 할 만한데? 진작에 이렇게 먹을 걸 그랬어.
용주부 : 한 달 뒤에도 과연 그럴까?
주로 나쁜 쪽으로 촉이 좋은 용주부의 예연대로 한 달이 되자,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할수만 있다면 입방정을 떤 내 주둥이를 내려치고 싶었다.
뭐든 싫증을 잘 내는 나답게 다이어트 식단은 맨날 똑같으니까 먹는 재미가 사라졌다. 게다가 호르몬의 노예인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극도로 예민해지고, 온몸이 MSG를 요구하고 있어서 견디기 어려웠다.
게다가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다이어트의 적, 명절이 돌아온 것이다!(두둥)
나 : 아아! 명절에도 이게 뭐야! 내 갈비찜! 내 육전! 내 동그랑땡!
용주부 : 할만하다며?
나 : 장난해? 다이어트도 휴일이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용주부 : 일주일에 한 번씩 치팅데이 하잖아?
나 : 겨우 한 끼 스파게티 먹는 거? 그게 무슨 치팅이야?
용주부 : 언제든 말만 해. 난 항상 준비되어 있어.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니.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딱 한 번만 먹을 건데 뭐 어때? 하는 마음과 그 한 번에 지금까지 애써 지켜온 것들이 와르르 무너질까 봐 겁나는 마음이 치열하게 싸웠다.
명절이라고 양가를 가거나 사람들과 모여 요란하게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친정은 부산에 있고, 시댁은 근처에 있으니 일부러 명절에 찾아가지는 않는다.
그래도 명절이라는 '느낌'이 있지 않은가?
아무리 평소처럼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시간을 보내도 명절이라는 분위기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우리끼리 명절마다 갈비찜을 해 먹는 소박한 의식도 못하게 되었으니 더욱 씁쓸했다.
용주부는 이런 나의 마음에 십분 공감하며 색다른 식단을 연구하기 바빴다. 이번에 장을 보면서 색다른 식재료를 사길래 엄청 궁금했다. 요즘엔 용주부가 어떤 새로운 메뉴를 선보일까 기대하는 낙으로 먹는다.
점심때가 되어 또(!) 고구마를 삶으려고 하니까 용주부가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주방에 스윽 가서 뭔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더니 30분도 채 안 되어서 날 불렀다. 나는 냄새가 솔솔 날 때부터 키보드에 손을 고정한 채 이제나 저제나 불러주기만을 대기하고 있었다.
또띠아는 가끔 피자를 만들어 먹을 때 쓰던 재료였다. 비주얼만 봤을 땐 오므라이스처럼 생겼는데 한 점 뜯어보니 모차렐라 치즈가 주욱 당겨 나왔다. 그 안에 있는 재료가 바로 고추참치였다.
장 볼 때 고추참치 캔을 왜 사나 했는데 여기에 넣는 용도였다. 고추참치와 다진 양파를 통밀 또띠아로 감싼 뒤 전체적으로 달걀물을 입혀서 노릇하게 구워낸 참치 또띠아는 무료한 식단의 활력소였다.
고추참치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또띠아의 속재료로 넣으니까 전혀 다른 맛이 나왔다. 또띠아가 작은 게 아쉬웠는데 한 개 다 먹으니 의외로 배가 불렀다.
명절 연휴 첫날은 참치 또띠아 덕에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이번 명절은 너무 길었다.
맨날 집에서 일하느라 날짜 개념도 없으면서 왜 이렇게 명절을 의식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평소처럼 운동을 하러 나갔다.
여름에 헬스장을 끊었다가 마지막엔 거의 억지로 가다 말다 했기에 이번엔 밖에서 운동하기로 했다. 마침 집 근처 초등학교에서 운동장을 일정 시간마다 개방한다는 걸 알고 거기서 걷다 뛰다 한다.
지난 주말부터 날씨가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오더니 그날도 곧 비올 조짐처럼 잔뜩 흐렸다. 아직 해 질 때도 되지 않았는데 운동장은 평소보다 어둑했고, 무엇보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때 알아챘어야 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평소에는 적어도 두 세명은 있었는데 명절이라서 다들 안 오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비가 와 축축해진 운동장을 몇 바퀴 뛰는데 그날따라 운동이 잘 됐다. 어제보다 기록이 단축되어서 조금 더 뛰다 보니 금세 어둑해졌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학교는 좀 을씨년스러웠다. 나는 운동을 마치고 왔던 길로 나가려고 정문으로 갔다.
문이 잠겨 있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다시 당겨봐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한 시간 전에 이 문으로 들어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혼자라는 자각이 들었다.
서둘러 후문으로 갔다. 역시나 잠겨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학교 운동장에 갇혀 버렸다.
연휴 동안 운동장을 개방한다는 현수막을 봤는데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다급해진 마음에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 자기야, 나 갇혔어!
용주부 : 뭐? 다쳤다고?
나 : 아니, 갇. 혔. 다. 고!
용주부 :........ OO초야? 거기 가만히 있어.
나는 용주부가 올 때까지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학교로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경비 업체에서 잠그고 간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운동장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은 하고 가야 할 게 아닌가? 게다가 휴일에 운동장 개방 시간은 밤 10시까지였고, 아직 6시도 안 된 시각이었다.
잠시 후, 용주부가 나타났다. 그는 횡단보도를 건너와 문 앞에 매달린 날 보며 황당한 웃음을 보였다.
나는 빨리 날 꺼내달라며, 경찰을 부르라고 난리를 쳤다. 담을 넘어오다가 CCTV에 찍히면 수상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염려가 됐다.
용주부는 나의 성화에 이리저리 주변을 살피다가 학교 앞에 있는 지구대에 갔다. 그런데 순찰 중인지 아무도 없다고 했다.
이제 제법 어두워졌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문 너머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만 고립된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문을 넘어왔다.
운동 신경이라고는 안드로메다로 보낸 내가 넘어질까 봐 얼마나 떨었는지 모른다. 뒤에서 용주부가 받쳐줄 거라는 걸 알았지만, 아직 다이어트 중인 나의 육중한 몸을 그가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다리를 후들거리며 한 발짝 씩 겨우 문을 넘어왔다. 초등학교라 문이 그렇게 크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다. 우리가 난리 치는 걸 빤히 쳐다보는 아저씨가 있었다.
"왜요? 문 잠겨서 담 넘는 사람 처음 봐요?" 라는 마음을 담아 째려보니 그 아저씨 왈 "여긴 문을 일찍 닫아요. 저도 한 번 넘어온 적이 있는데 다른 학교로 가는 게 나아요."라며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동병상련의 눈빛이었구나. 난 또.
후들거리는 다리를 용주부가 부축하다시피 해서(정말 유난이다) 겨우 집으로 왔다. 운동한 것보다 더 힘들었는지 손이 덜덜 떨렸다.
용주부 : 살다 살다 참 별 꼴을 다 본다야. 어휴.
나 : 사진으로 못 남겨서 아쉽다고 생각했지?
용주부 : 잘 아네.
나 : 도저히 안 되겠어. 오늘은 나 말리지 마.
나는 아직도 들끓는 아드레날린을 잠재울 뭔가가 필요했다. 생리 전 증후군 때문에 더욱 폭주하기 직전이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매운 음식이었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양념 금단 현상에 빠져 있었고, 특히 불닭면을 먹고 싶어 했다.
용주부도 참기 힘들었는지 챗 지피티와 한참을 얘기하더니 큰 결심을 하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양심상 닭가슴살부터 챙겼다. 평소라면 거들떠도 안 볼 편의점용 전 도시락과 유부초밥까지 쓸어 담았다.
불닭면을 한 입 넣는 순간 내 몸이 먼저 MSG의 그리운 맛을 알아보았다.
이렇게까지 감격스러울 일인가.
겨우 한 달 다이어트 식단을 한 걸로는 속세의 찌든 입 맛을 바꿔놓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닭가슴살을 먼저 먹은 다음 다른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이는 음식을 절반이나 남겼다. 특히 유부 초밥은 한 개씩밖에 못 먹었다. 나는 불닭면도 겨우 반 정도 먹었다.
분하지만 위가 줄어서 더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 : 자기도 그거밖에 못 먹어? 너무 실망이야.
용주부 : 졌어.
갑자기 폭주해서 식단이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 우리의 몹쓸 입맛은 예전 음식을 그리워했지만, 몸이 바쳐주질 않았다.
다 먹고 나니 속이 더부룩해서 소화제를 사 먹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런 음식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는 거다. 완전히는 아니고 며칠은 버틸 수 있는 정도로만.
다음 날, 그렇게 우려하던 만큼 몸무게가 불어 있지는 않았다. 잠깐 반성하기는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단기간에 살을 빼려는 게 아니다. 살을 빼도 유지하려면 또 몇 달의 시간이 걸린다.
지금 목표는 최소 6개월에서 최대 일 년 까지 보고 있다. 그렇게 긴 여정 동안 이 정도 일탈은 더 큰 참사를 막기 위한 예방책이었다고, 감히 변명해 본다.
그런데 아직 명절 연휴가 남았다.(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