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선택의 갑을 관계에 대하여
혼자가 되면 자유로워질 줄 알았다. 여전히 나는 내가 만든 틀 안에 갇혀 있다.
자,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니 네가 옳다는 걸 증명해봐.
내면의 감시자는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했다. 그 목소리를 외면할 정도로 나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이 아니기에 늘 마음 한구석이 쫓기는 기분이 든다.
마흔 후의 나는 새롭게 태어나야 하니 겉모습부터 바뀌어야 해!
공부를 시작했으니 남들보다 잘해야 돼!
프리랜서가 됐으니 직장인만큼 벌려면 더 노력해야 돼!
"저러니 이혼했지!"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면 더 발전해야 돼!
우리는 살면서 "~~ 해야 한다"는 원칙을 당연시 여긴다. 나는 동의한 적도 없는 사회적 합의에 의한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미 선 밖으로 벗어났으니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과 '더 늦기 전에 다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교차한다.
일상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먹는 문제'였다.
혼자가 아닐 때는 상대방의 입맛에 맞추느라 메뉴 선택에서 늘 '을'이었다. 내 글 중에서 "이혼 후에야 생선구이를 먹었다"가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이유가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닌가 한다. 혼자가 된 후에야 '내가 원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며 먹는 것과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물론 매일마다 레스토랑에 온 기분으로 음식을 차려 먹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선택에서 나는 '갑'이 되고 싶었다.
갑을 관계라고 해서 상하 수직적인 권력 구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한 끼 정도는 오롯이 음식을 먹는 즐거움에 집중하고 싶다는 얘기다.
며칠 전 중대한 결심을 했다. 더 이상 다이어트를 하지 않기로. 말로만 다이어트를 외친 적이 많지만 이제는 정말로 '다이어트'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했다.
심신의 균형이 깨진 상태에서 건강을 회복하는 일은 시급했다. 운동을 하고, 건강한 식단 조절을 했다. 소위 말하는 '닭가슴살'과 샐러드로 점철된 메뉴 위주로만 먹었다. 처음에는 먹을 만했다. 더 이상 누구의 식사를 차릴 필요도 없으니 간편하고 좋았다. 한동안 입맛도 없었기에 별로 힘들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일상이 익숙해질 무렵, 부작용이 나타났다. 다이어트 식단에 대한 욕구불만으로 소위 말하는 '제로 칼로리'나 칼로리가 적은 '다이어트용 대체 음식'을 폭풍 흡입하기도 했다. '이 음식은 살이 안(덜) 찌는 거니까 괜찮아'라고 자신을 속였다. 당연히 욕구불만은 더욱 커졌고, 먹는 게 불만스러워졌다. 운동도 하기 싫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이러고 있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왔고, 여러 가지 개인 사정에 의해서 PT도 그만두게 됐다. 그즈음 <다이어트 말고 직관적 식사>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다이어트를 관둬야겠다고 결심했다.
책의 저자는 "직관적 식사란 다이어트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해주는 새로운 식사법"이라고 했다. 직관적인 식사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내 안의 음식 경찰을 쫓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을'이 된 기분을 벗어나기 힘들다.
한동안 다이어트에 몰두하다가 이 책을 읽고, 자유롭게 먹는 나를 본 지인이 한마디 하길래 직관적 식사에 대한 얘기를 해 줬다. 역시나 이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내 말은 자기 합리화로 치부하며 "~~ 해야 한다"는 식의 뻔한 원칙을 강요하길래 그 친구와 손절했다. 사실 그 친구는 큰 잘못이 없다.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인 데 굳이 연락을 끊은 이유는 다이어트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원칙으로 상대를 평가하는 것에 질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예전부터 선택에서 '을'이 되는 것에 대해 노이로제에 가까운 예민 반응을 보였다. 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입식 교육을 받고 사회에 나가 보니 사장이나 고객사의 '을'이었고, 누군가의 평가에 자동적으로 '을'처럼 반응했다.
아주 사소하게는 한 직장에서 점심을 제공했는데 메뉴는 늘 상사에 '의해' 결정됐다. 도저히 먹기 싫어서 차라리 내 돈을 주고 따로 먹겠다고 해도 눈치를 줬다. 사회생활의 기본이 안되어 있다나 뭐라나. 영혼 없는 맞장구조차 나오지 않는 상사의 헛소리를 들으며 억지로 먹는 점심시간은 근로기준법 상 근무 시간에 포함되지도 않지만 야근 이상으로 쳐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딴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 라떼 같은 일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직장 내 사소한 갑을 관계는 여전히 존재한다. 명목상 월급 대표로도 일해보았기 때문에 사업주도 누군가의 '을'이라는 것을 잘 안다.
세상에서 내가 '갑'이 되는 순간이 얼마나 될까. 적어도 메뉴 선택만큼은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오늘부터 다이어트에게, 아니 나 자신에게 '갑'이 되기로 했다.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고, 지금 내가 원하는 음식은 무엇인지부터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습관적으로 먹어 온 음식말고, 진정으로 내가 좋아서 먹은 메뉴는 무엇인지 즉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나 자신을 '조건부'로 받아들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철학 선생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여운에 남는다.
세상에 당신을 잘 아는 '전문가'는 아무도 없음을 기억하라. 오로지 당신만이 자신의 생각과 감정, 경험을 제대로 안다. 당신이 문을 열고 들여보내 주지 않는 이상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에블린 트리볼리 외, <다이어트 말고 직관적 식사>, 골든어페어 출판,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