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가 고장난 김에
냉장고가 고장 났다.
처음에는 냉장고에서 물이 샜다. 냉장고 안에 있던 음식물이 샌 줄 알고 행주로 닦고 나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뒤로 몇 번 그러더니 냉장고에 야채가 시들기 시작했다.
일 때문에 몇 주간 집을 비운 뒤 돌아와 보니 냉장고는 이미 제기능을 상실한 듯 보였다. 그나마 냉동실만 사용 가능했다. 냉장고에 상한 음식물을 전부 정리하고 나니 김치와 된장, 고추장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바로 냉장고를 사지 않고 일단 이대로 지내보기로 했다. 냉장고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음식들을 처분하고 텅 빈 냉장고를 보며 뭔가 해방감을 느꼈다. 남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놔 봤자 다시 먹지도 않고, 양파나 대파 등 야채는 상하기 전에 다 먹어본 적이 별로 없다. 당장 냉장고를 살 여유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한 몫했다.
우선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하지 않고 한 끼 먹을 만큼만 조리하고, 밥상도 간소화했다. 밀키트 제품을 사거나 김치만으로 할 수 있는 음식 위주로만 해 먹었다. 엄마표 김치는 질리지도 않고, 곱창김과 참치만 있어도 밥 한 공기는 먹을 수 있으니 괜찮았다. 부족한 야채는 샐러드를 자주 사 먹었다.
가장 눈에 띈 변화는 '국'을 없앴다.
나 혼자 먹거나 공룡이 와 같이 먹거나 간에 국 자체를 만들지 않았다.
원래도 국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X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국을 끓였다. 아무리 진수성찬이 있어도 국이 없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라서 하다못해 계란 국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밥상에 국을 없애고 나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생겼다.
첫째, 조리 시간이 단축됐다.
국을 끓이려면 육수부터 만들어야 한다. 간단한 된장국이나 된장찌개를 끓이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대파, 양파, 버섯, 두부 등 기본 야채 손질을 해야 한다. 예전에는 하루 날 잡아서 큰 솥에 육수를 만드는 게 일이었다. 일일이 멸치와 다시마, 무 밑동이나 양파 껍질 등을 넣고 끓여서 식힌 후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한번 만들어 놓으면 몇 주를 쓸 수 있어서 편하긴 해도 날을 잡고 해야 할 만큼 일이었다. 음식물 쓰레기도 많이 나왔다. 식구가 둘 뿐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음식 맛에 집중하게 된다.
국을 끓이지 않는 대신 다른 반찬 가짓수를 늘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냉장고가 고장 난 데다가 반찬을 더 만들면 국을 없애는 의미가 별로 없다. 차라리 국을 끓이고, 반찬 수를 줄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에 하도 끓여서 질린 탓도 있고,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찬은 거의 참치나 베이컨을 넣은 김치 볶음, 마른 김, 두부 구이 정도가 전부였다. 원래부터 좋아하던 반찬들이었다. 국도 없이 반찬도 간결하게 해서 먹으니 반찬 맛을 더 느낄 수 있게 됐다. 밥에 싸 먹는 마른 김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과 김치 한 점이면 충분했다.
셋째, 뒷정리도 간편하다.
조리 시간이 단축된 만큼 밥을 먹은 후 설거지도 간편해졌다. 애초에 조리한 음식이 한 가지밖에 없고, 한 끼 먹을 분량 밖에 되지 않으니 설거지할 그릇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음식물 쓰레기도 적게 나온다.
국을 끓이면 아무리 적게 해도 2인분 이상이 된다. 예전에는 매일 국을 끓이기 힘들어서 한번 끓일 때 일부러 더 많이 만들었다. 먹고 나서 남은 건 냉장고에 넣어 뒀다. 그렇다고 이틀 연달아 같은 국을 먹지는 않았다. 질려하기 때문에 적어도 하루 정도는 텀을 두고 다른 국을 끓였다. 최소 일주일에 세 번은 국을 끓인 셈이다.
그 짓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니 밥 한 끼 차려먹는 번거로움이 훨씬 덜 했다.
넷째, 외식 횟수가 줄었다.
예전에는 국을 끓이고 적어도 반찬 한 가지 이상을 만들고 하려면 너무 힘들었다. 어쩌다 먹고 싶은 음식을 해 먹는 것과 적어도 하루 한 번 이상은 매 끼니마다 그렇게 밥상을 차리는 건 시작도 전에 지치는 일이었다. X와 역할 분담을 하려고 해도 기껏 해야 설거지 정도나 시킬까 그냥 내가 하는 게 나았다.
매 끼니마다 무슨 국에 무슨 반찬을 만들어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골치였다. 어떤 반찬을 만드느냐에 따라 국이 어울리려면 생각을 잘해야 했다. 만약에 제육볶음을 만들었다면 계란국을 만드느니 차라리 계란찜을 하는 게 낫다. 물론 "국은 없냐?"는 핀잔을 듣게 되겠지만. 이런 번거로움 때문에 시켜 먹거나 나가서 한 끼 먹을 때가 많았다. 이제는 밥상이 간소하니까 꼭 먹고 싶은 음식이 아니면 굳이 외식할 필요가 없다.
다섯째, 덜 짜게 먹는다.
미역국, 시래깃국, 된장국, 콩나물 국 등 국을 먹으면 염분 섭취를 더 하게 된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끓이면 더 그렇다. 집에서 인공 조미료를 쓰지 않고 국을 끓여도 마찬가지다. 국은 멸치 육수를 내지 않고 끓이면 깊은 맛이 없다. 인공 조미료도 쓰지 않기 때문에 간을 하려면 어쩔 수 없이 짜게 된다. 밥과 같이 먹을 때는 잘 몰라도 식사 후에 자꾸 물을 찾게 될 때가 있다.
이 모든 변화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간편하다"는 거였다. 나는 번거로운 걸 제일 싫어한다. "밥상에 국이 없으면 차려도 차린 게 아니다"라는 사람과 살면서 무던히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 말을 무시해도 싸움이 되고, 최대한 성의를 다하려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조금만 꼬투리가 잡혀도 싸움이 됐다.
냉장고가 고장 나기 전까지 국을 끓이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길들여져 있었나 보다. 나와 식성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야 식사 (준비하는) 시간이 즐겁다.
국을 없앴다고 해서 아예 국물류를 먹지 않는 건 아니다. 마라탕이나 짬뽕, 라면 등을 먹기도 했다. 식생활 자체를 바꿨다기 보다는 좀 더 간소화했다.
글을 쓰고 나서 제목을 "냉장고를 없애고 나서 생긴 일"로 써야 하나 잠시 고민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냉장고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니다. 냉동실은 사용 중이고 냉장칸이 시원찮아서 김치와 장류만 보관 중이다.
냉장고를 바꾸더라도 아마 국은 먹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굳이 끓이지 않을 것 같다. 냉장고도 양문 냉장고나 큰 냉장고를 살 필요가 없다.
냉장고가 커 봐야 구석에 처박아 놓고 뭐가 어디 있는 줄도 몰랐다가 버리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고 맨날 냉장고만 들여다보고 정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본가에 가서 "국 없이 밥 먹은 지 꽤 됐다"라고 했더니 아빠는 "국 없이 어떻게 밥을 먹냐"라고 하신다.
평생을 그런 식성으로 살아오신 분이니 이제 와서 "제발 국 타령 좀 그만 하시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아버지 밥상을 차려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평생 동안 국을 끓여온 어머니의 노고에 새삼 존경스러울 뿐.
며칠 전, 엄마가 곰국을 끓였으니 보내 주겠다고 하셨다. 곰국을 끓이면 아내가 며칠간 집을 비우는 신호라는 말이 있다. 요즘 시국에는 그건 아니지만 한동안 국 걱정은 안 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역국까지 같이 보내준다는 걸 거절했다.
곰국은 엄마 찬스가 아니면 사먹어야 하는 음식이고, 냉동실에 보관할 수 있으니 받기로 했다. 미역국은 엄마가 끓여준 게 맛있겠지만 냉장고에 보관할수도 없고, 국은 역시 즉석에서 끓여야 맛있다. 곧 미역국을 끓일 일이 있으니 그때 끓여 먹으면 된다.
식구가 많거나 식성이 다르면 국 없이 밥상을 차리는 게 쉽지 않다.
한 끼쯤은 국을 끓이는 시간 대신 식사를 간소화 하고 대화를 늘려보는 게 어떨까.
"국이 왜 없냐"라는 반찬 투정만 하지 않으면, 좀 더 오래 꼭꼭 씹어 먹으며 미처 몰랐던 음식의 맛을 음미하게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