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우선순위
우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10대까지 친구와의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했다.
부모님에게 말 못 할 비밀도 친구에게는 털어놓을 수 있었다. 부모님의 말보다 친구의 말에 더 귀 기울였다. 어쩌다 친구와 싸운 날이면 하루 종일 걱정이 되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수업 시간에 몰래 돌려보는 쪽지와 편지들로 모자라 매일 만나서 대화를 해도 할 얘기가 끝이 없었다. 지나고 보면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만의 비밀인 양 특별한 느낌을 즐겼던 것 같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반이 갈릴 때마다 친구의 우선순위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사는 세상의 친구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친구를 넓게 사귀는 편이 아니었고,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아이였기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여러 명이서 동시에 만나는 것보다 단둘이 만나는 걸 더 좋아했다.
대학교에 가면서 친구의 범위가 달라졌다.
여전히 우정이 소중했지만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의 친구와 지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친구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예전만큼 자주 만나지는 못해도 가끔 만날 때마다 그 시절의 추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 또 한 번 친구가 갈렸다.
집안 사정상 몇 번의 휴학을 한 끝에 7년 만에 졸업을 했으니(남들이 물으면 군대에 다녀왔다고 했다) 친구들은 이미 사회생활을 한창 하고 있었다.
사회 초년생에게 친구란 직장 상사의 험담을 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직장 동료와 하는 험담과 달리 뒤탈이 날 일이 없으니까. 서로 비슷한 고민을 하며 동병상련을 느낄 수 있었다.
이십 대부터 친구와 하는 대화의 대부분은 남자와 직장 얘기였다.
사실 직장보다 남자 얘기가 비중이 더 컸다.
미래의 비전이나 일에 대한 고민을 나누기는 했지만 나는 주로 들어주는 쪽이었다.
내 얘기를 잘하지 않는 성향이라 친구들의 고민 상담을 종종 들어주곤 했다.
친구의 고민을 들어주며 나의 힘든 상황을 잊을 수 있었고,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좋았다.
삼십 대가 되고, 하나 둘 결혼을 하기 시작하면서 친구의 개념 자체가 달라졌다.
언젠가부터 연락이 뜸해진 동창이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올 때는 십중팔구 결혼 소식을 전했다.
사회적 체면 때문인지 결혼식의 하객을 관리하느라 묵혀두었던 연락처를 뒤져서 기어이 청첩장을 보내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훗날 자신의 결혼식에 대비해서 품앗이처럼 서로 하객을 해 주는 관례 아닌 관례로 묵인되었다.
대학교 때 친한 친구가 둘 있었는데 내가 먼저 결혼을 할 조짐을 보이자 그때부터 나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친구보다 결혼을 더 중시하니까 서운한 일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친구들의 따돌림을 당하다시피 했다. 수없이 먼저 전화를 하고 연락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차라리 대놓고 싸우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납득하지 못한 채로 결혼을 앞두고 마음이 더욱 심란했다.
결혼식 며칠 전 그토록 내 연락을 씹던 친구 중 한 명에게 문자가 왔다.
"00아. 결혼 축하해. 결혼식에는 꼭 갈게."
결혼식에 올 친구가 늘어서 기쁜 게 아니라 바보 같이 다시 친구와 연락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친구들은 결혼식에 오긴 했지만 신부 대기실에 오지도 않았고 나와 따로 인사를 하지도 않았다.
결혼식 후 "와 줘서 고맙다"는 연락을 했지만 역시나 무시당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아무리 곱씹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유도 모른 채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차단당한 기억은 오랫동안 상처로 남아서 가끔씩 꿈에 나타날 정도였다.
그 후로 원래도 몇 안 되는 친구 관계가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결혼 후에는 결혼 전의 친구와 예전처럼 지내기가 힘들어졌다.
직장을 다니며 결혼 생활을 하니 신경 써야 할 일이 곱절로 늘었다. 심지어 아이까지 생기면 아이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우정이고 친구고 간에 온 신경이 아이에게 쏠린다.
간간히 연락을 하고 지내던 친구도 아이를 낳으면 혹시나 아이가 깰까 봐 연락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친구도 아이 때문에 연락하는 게 힘들어지니 안부 전화만 연례행사처럼 하게 됐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밤새 대화를 나누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았다.
어쩌다 직장에서 만나 마음이 맞는 동료와 퇴사 후에도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지만 어릴 때부터 알던 친구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난다.
공부 모임에서 만난 동기들과 공통 관심사로 대화를 나누는 건 즐거웠지만 결국 '친구에 가까운 지인'일 뿐 그 이상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사회에서 만난 지인과 친구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많은 노력과 타이밍이 필요했다.
결혼과 동시에 사는 게 힘들어지니 원래도 내 얘기를 잘하지 않는 편인데 더욱 말을 하지 않게 됐다.
내가 먼저 연락을 끊다시피 하니 간간히 연락하던 친구와 지금은 모두 소식이 끊긴 상태다.
결혼이 끝난 후 다시 혼자가 됐을 때 가장 아쉬웠던 건 힘들다고 솔직하게 얘기할 용기가 없어서 연락이 다 끊긴 친구들이었다.
가족도 없는 낯선 곳에서 오롯이 혼자가 됐다고 자각하는 순간, 무한한 자유의 막막함을 느꼈다.
이제 와서 다시 연락하자니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도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아직 이혼의 생채기가 덜 나았을 때라서 다시 관계의 상처를 회복할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딱 한 명, 나에게 가장 오래된 친구가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7년 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중간에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몇 년 만에 찾아가긴 했었지만 워낙 경황이 없을 때라 따로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이제 와서 연락을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용기 내서 연락을 했다.
"잘 지내니? 오랜만이지?"
흔한 인사에도 친구는 아주 흔쾌히 반갑게 받아 주었다.
그간 나의 근황을 몇 마디 문자로 나누기에는 벅찼다. 우리는 며칠 후에 바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금방 만날 수 있는걸, 그동안 친구와의 우정을 막은 건 거리가 아니라 마음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친구라 서로 가족사까지 속속들이 알아왔기 때문인지 몇 년 만에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친구는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나는 이혼녀가 되어 있었지만 둘만 있을 때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 상 친구는 우정을 우선순위로 둘 수 없었다. 그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다만 너무 가정에 메여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친구에게는 우정이라는 공간을 차지할 일말의 여유가 남아있지 않았다. 내 친구가 가까이 지내는 친구는 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나 이웃 정도였다.
여자는 결혼하면 자녀의 친구에 따라 자신의 친구가 바뀐다더니 그 말이 이해가 갔다. 직접 겪어보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나의 친구이기 전에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였다. 주변에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도 다 자신의 자녀와 공통점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 사이였다.
오히려 나를 만나서 오롯이 자신으로 돌아가게 되니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듯했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친구는 전업 주부 생활을 오래 해서 사회로 나가는 게 두렵다고 했다. 아이의 시험기간이라서 만날 수 없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친구에게 필요한 건 친구가 아닌데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군 게 아닌가 싶었다.
이혼을 하니 친구와의 우정이 그리웠다. 참 바보 같았다. 나 또한 친구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서 친구를 찾으니 씁쓸했다.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를 다시 보면서 부러웠던 건 뉴요커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그녀들의 우정이었다.
토요일 오전마다 모여 브런치를 먹으며 허물없이 대화를 하는 모습이 왜 그렇게 부러운지 모르겠다.
아마 우정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은 것이라 그런 것 같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남녀 사이에만 해당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말 같다.
그 시절에 함께 웃고 즐기던 친구와의 추억은 남는다. 추억은 혼자 간직할 수 있으니 원하는 만큼 간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정은? 그 시절 친구와의 우정은 유통기한이 다 되었을 수도 있다.
인간관계를 무슨 식품도 아니고 유통기한에 비유하다니 너무 계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유통기한이 다 되어서 폐기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우정에 정해진 기간이 있다면 그 후로는 아무리 애써본들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얘기다.
다만, 우정의 유통기한은 일회성이 아니다. 적절한 시기가 되면 기대해 볼 수 있다.
친구와 내가 더 나이가 들어서 다시 온전한 '나'로 집중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우정은 다시 시작될 것이라 믿는다.
고로,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정을 나눌 친구가 있을 때 그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나는 얼마나 순간에 충실했나 돌이켜 본다.
아쉬움이 많이 남는 걸 보면 별로 충실했다고 보기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것이 많아지고 현실의 무게에 어깨가 무거워서 우정까지 짊어지고 갈 여력이 없어진다. 지나고 보면 뭐 그렇게 아등바등 대며 살았나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인생의 우선순위가 당장 눈에 급한 것이 기준이 아니라 진짜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로 순위를 정한다면 지금과 같을까?
인생의 우선순위가 바뀌어도, 우정이 끝난 것 같아도 세월이 더 지나 봐야 알 일이다.
나는 아직 친구와의 우정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