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불안'을 다스리는 법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배웠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다 내 잘못인 줄 알았다.
책임감이 강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고 착각했다.
아이러니한 건 내가 최선을 다하고 애를 쓸수록 원하는 결과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더욱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나 자신을 채찍질했다. 이런 식으로 나를 갉아먹다 보니 나는 점점 더 지쳐갔다.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고, 마흔이 다 되어서야 완전히 환상이 깨졌다.
지금은 가장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말이 "열심히 해라!", "최선을 다하라!", "힘내라!", "파이팅!" 같은 위로를 가장한 무책임한 부류의 말들이다.
(대부분) 열심히,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과연 그 결과도 공정했던가? 단순히 금수저론이나 운칠기삼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이상 나는 직장에서 한 번도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면 '안' 되었다.
서로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입사 후 3개월간 평가를 당했고, 그 후에도 연봉 협상(!)이라는 것은 회사와 나의 협상이 아니라 회사가 정한 금액에 나를 끼워 맞추기 위한 현실 타협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 욕심이 많았고, 더 성장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커리어가 중요하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고 착각한 회사에서 몸과 맘을 바쳐 헌신하다 헌신짝이 되어 버렸다.
출퇴근 시간이 지하철로 가도 왕복 3시간이 넘었다. 경기도 지하철역의 종점과 가까운 역에서 강남 방면으로 9시까지 출근하려면 최소 7시 30분 전에 타야 했다. 문제는 그 시간에 출근자가 너무 많아서 종점에서 이미 90% 이상 차 있어서 빈 좌석이 없었다. 탈 때부터 못 앉으면 내릴 때까지 쭉 서서 가야 했다. 서 있는 건 괜찮은데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서 있는 건지 끼어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마 대부분 서울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라면 어떤 상황인지 잘 알 것이다. 계속되는 야근에 몸도 피곤한데 출근부터 시달려서 가려니 회사에 도착하면 에너지가 바닥 나 있었다. 어차피 할 일도 많으니 차라리 일찍 가자고 결심하고 새벽 6시 30분 전에 지하철을 탔다. 그나마 앉아갈 수 있으니 잠을 줄여도 그게 맘이 편했다.
회사에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정시에 퇴근하려니(그럴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퇴근 지옥철을 타느니 좀 여유로울 때 가야겠다는 이상한 합리화로 최소 8시 전에 퇴근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서 씻고 나면 긴장이 풀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종이 인형 같은 상태가 됐다.
다음날 출근 지하철을 시간에 맞춰 타야 한다는 압박감과 불안에 너무 피곤해도 절로 눈이 떠졌다. 어쩌다 몇 분이라도 늦은 날에는 멀리서 지하철이 오는 신호음 소리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타야 한다는 맹목적인 목표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억지로 끌고 뛰었다. 그렇게 헉헉 거리며 지하철 좌석에 앉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이런 생활은 몇 달간 익숙해지니 견딜만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유난 떨 거 없다고 되내었다.
회사가 업력은 있지만, 신생 법인을 추가로 만들면서 사무실 오픈 준비는 물론 사업설명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간판 디자인 및 주문부터 문고리, 사무실 전등까지 모든 물품의 준비부터 실행까지 오롯이 내 몫이었다. 하다못해 대봉투 하나를 주문해도 문구 하나하나부터 디자인, 견적 비교까지 결정 권한도 없는 임원 아닌 일개미에 불과했다.
회사에서 나의 위치는 직원과 임원 그 중간 사이였다. 다른 직원의 입장에서는 임원이었고, 나의 입장에서는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하며 월급 받는 건 마찬가지니 직원이었다. 위에서 지시하는 대표는 있지만 중간에서 일이 진행되게 처리하는 건 모두 내 책임이었다.
몹쓸 책임감이 최고조로 발동해 밤낮 가리지 않고 뛰었다.
사전에 충분히 계획되지 않은 사업설명회인 데다가 신생 회사라서 조직 체계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니 일일이 챙기지 않으면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초청장 인쇄 디자인부터 납품 일정은 물론이고 온갖 것의 결제를 내가 다 올려야 진행이 되었다. 내가 중간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모든 일이 늦어진다는 압박감에 점심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그날 일이 마무리가 안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조건 밀어붙이기만 하는 대표와 현실적인 이유로 타협이 불가능한 일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독재자 같은 대표에게 불만이 폭주한 직원들을 달래 가며 일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너는 임원이니까, 대표의 총애를 받으니까 그렇겠지."라는 식의 뒷말이 듣기 싫어서 그 누구보다 먼저 열심히 뛰었다. 오죽하면 대표 때문에 관두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나보고 좀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남기며 떠났을까. 바보같이 그 말이 "참 열심히 하시니 귀감이 됩니다"라는 칭찬인 줄 알고, "더! 더! 더!" 완벽해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사업설명회 전날, 여전히 정리가 안 된 공간과 귀빈 명찰, 설명회 자료까지 챙기다가 새벽 2시가 훌쩍 넘었다. 사업설명회를 준비하는 동안 다음 날 새벽 퇴근과 밤샘 근무를 몇 번이나 했기 때문에 행사 당일에는 집에 들어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반이 넘게 걸려 집에 가 봤자 두세 시간 잠깐 눈만 붙이고 나와야 하는데 그게 더 피곤했다.
혼자 숙소를 잡아본 적이 없어서 호텔을 잡을 엄두는 안 나고(회사 경비 지원은 당연히 안되니), 모텔을 잡자니 좀 꺼림칙했다. 근처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찜질방이 있는데 1인실이 구분되어 있다고 해서 거기 가기로 했다. 어차피 잠잘 생각은 하지 않았고 피곤하니 목욕이나 하자는 심산이었다.
사업설명회에서 발표까지 하게 되어서 난생처음 미용실을 예약하고 메이크업까지 받았다. 찜질방에서 두 시간 정도 누워만 있다가 목욕을 하고 아침 7시에 메이크업을 받았다. 모두 내 돈 내산이지만, 스스로 완벽하게 준비하고 싶었다.
행사 당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지나고 어쨌든 무사히 끝났다.
이제 좀 쉬엄쉬엄해도 되지 않을까 했는데 그다음 날이 되자 전과 같은 하루가 시작되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내 몸이 먼저 아우성쳤다. 몸은 너무 피곤한데 신경이 곤두서서 불면증에 시달렸다. 항상 신경이 예민했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 두통, 허리 디스크, 위장 장애 등등 병이라고 하기도 뭐한 만성 장애에 늘 약을 달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번아웃이 심하게 왔던 것 같다. 회사는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했고, 투자를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늘 쫓기듯이 일했다. 퇴근할 시간이 한참 지나도 뭔가 빠트린 것 같아서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대표와 한바탕 싸우고 나가던 직원이 나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인사담당자이기도 했던 나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해요?"라고 물었다.
내 일이니까요.
내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나보고 "너무 착한 거 아니냐"는 둥 "대표는 소피님 같은 직원이 있어서 든든하겠다"는 둥 악담과 저주를 퍼부으며 떠났다.
그 후로도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여느 때와 같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만성질환에 이어 한 번씩 가슴이 쥐어짜듯이 아파왔다. 잠깐 그러다 지나가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점점 빈도수가 잦아졌다. 심장 근처가 찌릿찌릿하게 아파오고, 숨이 턱턱 막혔다. 주로 회사에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오는 증상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인걸 알았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명확했다.
심장에 이상이 있나 싶어 심전도 검사부터 온갖 검사를 하고 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고 약을 먹고 힘들게 번 돈을 병원비로 탕진했다. 월급의 30%는 늘 병원비로 나갔다.
그렇게 겨우 버티고 있는데 회사에서 또 사건이 터졌다. 지금은 무슨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대표 혼자) 심각해서 인사관리자인 나보고 시말서를 쓰라고 했다.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분노와 허탈감이 동시에 들어 시말서와 사직서를 함께 냈다.
대표는 놀라서 달래듯 만류했지만 이미 맘이 떠난 뒤였다. 그 뒤에도 몇 달을 더 일할 수밖에 없었다. 후임자가 없어서 내가 채용 사이트에 후임자 공고를 내고 직접 뽑아서 같이 일을 하면서 인수인계를 한 뒤에 겨우 관둘 수 있었다. 대표는 관두는 게 아니라 잠시 쉬다 오라고 했지만 영원히 날 노예로 묶어둘 검은 속내를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번아웃의 후유증은 예상보다 깊었다.
그러나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일하느라 잠시 모른 척 덮어두었던 결혼 생활 문제에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집에 있는 게 더 불안했다. 그리고 다시 몇 달만에 현실적인 이유로 취업을 했지만 첫 출근 하는 날 직감했다.
아! 아직 몸 상태가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구나.
결국 또 관두고, 결혼도 관두었다.
그 후 예전에 일했지만 회사 사정이 좋지 못해서 관둔 곳에서 다시 인연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어딜 가나 회사에 문제는 있지만 그나마 알던 곳이고, 좋게 관둔 곳이라 내 상황에 맞게 조율할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그나마 '덜' 불안할 수 있었다.
일하면서 대학원에 진학했기에 병행할 수 있는 곳이고, 할 일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었고 예측이 가능해서 정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내 할 일만 하면 되니 책임질 일이 많지 않았다.
온몸으로 부딪쳐 이십 년이 가까운 직장 생활에서 터득한 나만의 '직장에서 불안을 다스리는 법'은 이렇다.
1. 직장에서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정한다.
예를 들어 연봉이나 야근이 없는 곳이나 업무 비전, 등등 여러 가지 중에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이것만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을 기준으로 직장을 택한다. 나는 예전에 거리가 멀고, 일이 많아도 직접 책임지고 프로젝트를 지휘할 수 있는 지위를 우선으로 선택했었다. 직장에서 인정받고 커리어를 쌓는 것을 중점으로 두었기에 한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연봉은 절반으로 포기해도 야근 없고 업무 강도도 높지 않아서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곳을 택했다.
2. 직장은 자기 계발을 하는 곳이 아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성과를 인정받고 싶고, 성장하길 원한다. 하지만 고작 몇 푼의 직책 수당을 받으며 팀장 이상의 직책을 달아봤자 돌아오는 것은 기대 이하다. 물론, 직장을 통해 배우고 경험하는 것은 많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 계발은 직장에서 하는 것이 아니다.
3. 직장과 나는 영원한 평행선이다.
직장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들(대표 이하 임원 포함)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 반대로 회사가 아무리 성장하고 잘 나가든 말든 나의 성장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한때 영혼까지 불살랐던 회사의 대표는 "투자가 눈앞에 와있고, 회사가 성장하면 주주가 될 수 있고" 어쩌고를 늘 입에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회사가 투자를 받는데 사활을 걸고 열심히 했다. 하지만 투자를 받든 말든 나와는 별 상관이 없다. 당장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일만 늘어난다. 직장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4. 몸이 보내는 불안의 신호를 무시하지 마라.
우리 몸과 정신은 연결되어 있다. 어느 것이 우위라고 논하기에 앞서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좀 더 관대해져야 한다. '남한테 엄격하고 자신에게 더 엄격한' ㅈㄹ맞은 성격 때문에 스스로 피곤한 타입인 걸 알기에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똑바로 인식은 하려고 한다.
5. 마지막으로 회사와 나를 분리해라.
직장이 당연히!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그저 월급 받는 수단 뿐임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하루 중 황금 시간을 직장에 갖다 바치니 직장의 역할과 자신이 분리가 잘 되지 않는다. 직장에서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거나 회사 일에 압박감이 심하거나 할 때 회사를 나와도 여전히 스트레스가 남아 있다. 친구와 안주거리 삼아 회사 욕을 하며 맥주 한 잔을 해도 그때뿐, 근본적인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일요일 저녁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몸은 집에 편안히 누워있지만 전혀 편하지 않다. 직장에서 정의하는 자신이 마치 전부인 양 착각하게 된다. 회사가 나를 규정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나는 참 미련하게 직장 생활을 했다.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아무 의미 없다'라는 걸 안다. 몹쓸 인정 욕구와 죄책감을 교묘히 이용하는 소시오패스 같은 회사 대표를 많이 만나봤기 때문에 자존감을 높이기가 쉽지 않다.
하... 여기까지 쓰는데 몇 번이나 멈춰야 했다. 보통 브런치에 글을 쓰면 한 번에 쓰는 편인데 직장 얘기는 한 번으로 끝날 얘기가 아니다. 쓰다 보니 잊고 있던 옛 생각이 자꾸 떠올라 새삼 그때의 나에게 화가 나 눈물이 난다.
시중에 수많은 직장인 자기 계발서와 관련 콘텐츠가 차고 넘치지만 '지혜롭게, 현명하게' 대처하는 법은 잘 모르겠다. 만신창이로 한 달 월급을 위해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오는 것뿐.
십 원짜리 욕이 절로 나오는 현실에서 '나답게' 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나다운 게 뭔데?라고 반문한다면 글쎄, 그건 평생 알아가야 할 숙제다.
조금만 덜 불안해하고, 그저 방향만 잃지 않으면 찾을 수 있다.(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