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글을 쓰는 이유
트라우마는 자신과 친구, 가족, 이웃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中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의 도입부에 나오는 인상적인 첫 문장이다.
사람을 볼 때 첫인상이 중요하듯 책을 읽을 때도 첫 문장이 중요하다.
제일 처음 시작하는 첫 문장이나 도입부에서 인상적인 첫 문장을 찾으면 그 책과의 첫 만남은 성공적이다.
첫 만남에 비해 전체적으로 실망스럽더라도 첫 문장만은 기억에 남는다. 첫 문장을 건지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글 쓸 때도 첫 문장이 중요하다. 첫 문장을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간결함과 강력함이 같지는 않지만 아직은 내 미숙한 글솜씨가 그나마 좀 보완이 된달까.
사람이 트라우마를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 서평집 <고전 명저 콘서트> 中
윗 문장은 콜크의 <몸은 기억한다>를 읽고 쓴 내 서평의 첫 문장이다. 이 글은 서평집 <고전 명저 콘서트>에 실렸다.
트라우마 전문가인 콜크 박사의 임상 기록을 읽고, 트라우마란 전쟁이나 포로수용소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만 경험하는 게 아니라 우리 주변, 가족 누구나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콜크 박사는 "트라우마는 자신과 친구, 가족, 이웃으로 인해 생길 수도 있다"는 한 문장으로 7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책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다. 책을 끝까지 읽어가다 보면, 이 말이 더욱 생생하게 와닿는다.
아침이 되어도 동주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 손창섭, <잉여인간> 中 "생활적"
만기 치과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 손창섭, <잉여인간> 中 "잉여인간"
남겨진 자, '잉여인간'은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인간이다. - 서평집 <고전 명저 콘서트> 中
서평집 <고전 명저 콘서트>에 실린 또 다른 서평이다.
손창섭의 단편소설 모음집 <잉여인간>에 실린 단편 "생활적"의 첫 문장은 글을 끝까지 읽고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오면 그 한마디가 이 글 전체를 함축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소설 속 동주라는 인물은 전쟁 후 고문후유증으로 죽지 못해 사는 인물이다. 그의 상황을 저 첫 문장만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작가의 역량이 뛰어날수록 첫 문장으로 글 전체를 대변한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내가 읽은 대부분의 글은 그랬다. 그 첫 문장에 매료되어 글을 읽고, 그런 글을 닮고 싶어 글을 쓴다.
책을 고를 때도 저자 소개와 목차 서문도 살피지만 첫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너무 성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첫인상이 전체를 좌우하는 걸.
첫 문장만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글을 쓰고 싶었으나 의욕에 비해 끈기와 인내심은 절반도 되지 않아서 중단했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책 중에 다 읽지도 못하는 게 태반인데 '굳이' 나까지 보탤 필요 있나?
그럴듯한 핑계를 대며 독자로만 머물러 있으려고 했다. 신기한 건 책을 읽을수록 자꾸 쓰고 싶어 지더라는 것이다. '잘' 쓰는 것과는 별개로 읽다 보면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
그런 욕구 덕에 서평 수업도 듣고, 서평집에 내가 쓴 서평의 일부도 실렸다.
18명이나 되는 공저자 중에 한 명일 뿐인데 뭐 대수겠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온전히 내 책이 아니라고 여겼다.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책을 받아보는 경험은 달랐다. 세상에는 안다고 생각만 하는 것과 실제로 경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책에서 내 글의 첫 문장을 대하는 느낌은 색달랐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쓰고 있다.
브런치에 몇 자 끼적이는 것만으로 제대로 글을 쓴다고 할 수 있을는지 잘 모르겠다. 브런치는 주로 에세이류를 쓰지만 아직은 내가 못써본 글이 많고, 어떤 글을 잘 쓰는지도 아직 모르겠다.
그동안 '잘' 쓰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계속 쓰지 못했다. 완벽하게 차려진 모습만 보여주려고 했다. 그 압박감이 스스로를 옥죄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작년 하반기 브런치 공모전 이후 또 글 쓸 의욕을 잃었다. 가장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동안 아예 글을 안 쓴 건 아니었다. 논문도 글쓰기에 해당한다면 말이다.
작년 말부터 논문 쓰기에 매진하느라 다른 글은 쓸 엄두도 못 냈다. 처음 하는 도전이었기에 나의 강박증은 최고조에 달했다. 항상 호흡이 짧은 글만 쓰다가 그렇게 긴 호흡의 글은 처음 썼다.
시작할 땐 막막했는데 매일 조금씩 하니까 어쨌든 완성하는 신기한 경험을 한 후 다시 글 쓸 용기가 생겼다.
첫 문장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잘 쓰려고 하지 않고, 계속 쓰려고 한다.
언젠가는 독자가 설레는 첫 문장을 쓸 날이 있겠지. 마지막까지 여운이 남는 그런 첫 문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