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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May 10. 2016

무사안일한 일상을 뚫고 나온 웹툰 『송곳』의 힘

섬세하게 읽어내고, 용기 있게 드러낸 진실의 단면

           

   웹툰 『송곳』의 후폭풍이 심상치 않다. 『송곳』이 연재되고 있는 포털사이트에서의 찬사는 두말할 것 없고, ‘노동운동의 교과서’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이다. 심지어 웹툰의 댓글란에는 자신의 직장에서 일어나는 사연을 토로하거나, 이 웹툰을 읽고 떼인 임금을 받아냈다고 환호하는 독자들이 등장한다. 작년 5월에는 만화 전문 출판사가 아닌, 무려 창작과비평사에서 『송곳』 1~3권이 출간되었으며, JTBC에서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했다. 아직 완결되지도 않은 웹툰 하나가 온라인과 오프라인, 노동자와 메이저출판사, 종편방송을 넘나들며 그 영향력을 쉼없이 뿜어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웹툰이 참신한 스토리의 보고로 주목받는 시대이지만, 아무래도 개그코드가 담긴 일상적인 이야기, 흥미로운 액션과 판타지물, 컬러풀한 그림이 주를 이루는 웹툰 시장에서, 노동운동이라는 불편한 소재를 건조한 흑백의 그림체로 그려낸 『송곳』의 약진은 아무래도 남달라 보인다. 이 만화, 도대체 무엇이기에 지금 이토록 넓은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까.     


웹툰 『송곳』중에서


  『송곳』은 2007년의 까르푸-이랜드홈에버 사태를 모티브로 하여 외국계 대형마트에서 벌어지는 부당해고에 대항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작가 최규석은 1998년 데뷔한 이래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100도씨』 등의 작품을 통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블랙유머를 곁들여 꾸준히 표현해왔다. 『송곳』은 그의 첫 웹툰으로 주요 포털사이트, 그 중에서도 다음 아닌 네이버에서 연재한다는 것에서 유추되는 분위기와는 반대로, 오히려 전작들보다 유머는 줄어들고 소재는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곳』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현실을 너무도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2008년부터 『송곳』을 준비하며 철저한 현장조사를 해왔다고 한다. 주인공 이수인의 모델인 까르푸-이랜드홈에버 사태 당시의 김경욱 일반노조 위원장과 구고신의 모델인 노동운동가 하종강 교수를 수차례 만나며 취재했고, 수 년 간에 걸친 조사 기간 동안 다양한 현장에 찾아가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났다. 이러한 과정은 최규석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통찰력에 힘을 더했고, 『송곳』의 세계는 더 현실과 가까워졌다. 그러면서도 특유의 블랙유머를 더한 촌철살인의 대사는 더 깊고 날카로워져서 이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      


『송곳』의 배경인 프랑스계 대형마트 푸르미(Fourmis, 프랑스어로 ‘개미’라는 뜻)는 친숙하고도 일상적인 공간이며,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신선식품부의 과장인 이수인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실 그는 무사안일한 세상의 걸림돌 같은 인간이다. 서로 눈치를 보며 아슬아슬하게 지키고 있는 침묵 속에서 저 혼자 목소리를 내고, 저 스스로도 제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구태의연하고 비겁한 평화를 뚫고 나오는 인간. 부조리에 침묵하며 그저 무사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게도, 그들의 무사함을 볼모로 이득을 취하고 군림하려는 이들에게도, 그리고 이수인 제 자신에게도 참으로 불편한 인간이다.

웹툰 『송곳』중에서

  학교와 군대에서 송곳같은 자신을 감추지 못해 스스로 뚫고 나와 버린 이수인은 비교적 합리적인 근무환경을 제공하는 프랑스계 대형마트 푸르미에 자신을 안착시켜 조용히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대체하려는 경영진의 지시에 의해 제 손으로 부당해고를 행해야 하는 입장이 되자, 그는 다시 제 자신을 어쩌지 못하는 송곳이 되어 노조에 가입하게 된다. 이후 이야기는 주인공 이수인과 그를 돕는 노동운동가 구고신, 다양한 입장을 가진 마트의 평범한 직원들을 중심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고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아낸다.


  사실 푸르미와 같은 대형마트는 너무도 일상적이어서 전혀 낯설 것 없는 공간이다. 누군가 우리에게 대형마트를 잘 아느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은 각 존재마다, 각 입장마다 달라서, 하나의 세계일지라도 그 인식의 층은 헤아릴 수 없다. 때문에 우리가 같은 시공간에 존재했다 하더라도 전혀 인식할 수 없었던 진실도 있다. 밝고 활기차 보이는 대형 마트의 바닥에 습기 찬 공기처럼 무겁게 깔려 있는 노동의 진실, 『송곳』은 그 진실의 단면을 용기있게 드러낸다.


  최규석의 가장 뛰어난 장점은 그 불편한 진실을 격렬한 감정으로 표현하지도 않고, 무조건적인 감정이입을 요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밀도있고 명료한 표현으로 인간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를 지킬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다양한 존재들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노동조합으로써 단결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우리는 그들이 일상의 평온을 깨지 못해 안달하는 별나고 모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한 현실 앞에서 물러설 곳이 없어 스스로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껍데기를 뚫고 나오는 송곳이 될 수밖에 없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를 한 번 더 곱씹으면 언젠가는 내가 그들이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마침내 『송곳』의 세계와 다를 것 없는 현실의 부조리하고 적나라한 속살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 모든 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님에 가슴이 먹먹하게 저려온다. 『송곳』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은, 주인공 이수인의 말투처럼 차분하고 담담하지만, 정작 보는 이의 가슴 속에서 거센 폭풍이 일게 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웹툰 『송곳』중에서


  사실 『송곳』이 말하는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른 이유 없이 그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대접을 받아야하고, 노동을 제공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 동료 간이건 노사관계이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서로 기본적인 배려와 예의를 갖추어야 하며, 누구나 두려워하지 않고 부당함을 논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때때로 관행에 젖어 둔감하게 인식하지 못하거나, “세상이 다 그런거지.”라고 진통제 맞듯이 읊조리며 고개를 돌려 버리곤 하는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들 말이다.

  가끔 등장하는 블랙 유머 말고는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한 이 만화가 큰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는 다름 아닌 명백하게 당연한 진실이다. 여기에 사람이, 그것도 특별할 것 하나 없이 아주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작은 이야기 하나로 갑작스레 천지가 개벽하지는 않는다는 것 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진실한 힘을 가진 이야기가 영원히 고요할 것 같던 수면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그것이 반복되다보면, 서서히 밀물이 올라오듯 변화가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송곳』의 대사처럼, ‘비겁하고 무력해 보이는 껍데기를 잡고, 흔들고, 압박하면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 앞이 절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송곳』은 그런 인간 하나쯤이 아니라 여럿도 뚫고 나오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이야기이다. 송곳을 닮은 작가 최규석의 날카로운 끝이 어디까지 뚫고 나올 것인지, 이 이야기의 힘이 얼마나 더 큰 물결을 일으킬 것인지 끝까지 주목하고 싶다.








※ 본 글은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9월호에 기고했던 것으로, 일부를 수정 및 변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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