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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May 11. 2016

'맛집'에서 비운 영혼의 그릇

우리는 정말로 행복하게 먹고 있을까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 문장은, 프랑스의 미식평론가 장 앙텔름 브리야 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1826)이 했던 말이다. 그는 원래 법관이었으나, 인류의 식생활사와 음식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유머러스한 성찰로 풀어낸 미식담론서 『미각의 생리학』(1825)을 통해서 미식평론가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준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 혹은 더불어 알려진 "한 국가의 운명은 그 나라가 식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라는 브리야 사바랭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이고 일상적인 행위인 동시에 인간을 둘러 싼 모든 것의 집약이다. 때문에 ‘미식(美食)’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인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을 넘어서 음식과 먹는 행위의 전후 사정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음식을 만들거나, 보거나, 먹거나, 즐기는 모든 행위와 관련하여 오감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과 정신적인 아름다움까지 포함한 식문화의 미적 양식을 총칭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식을 대하고, 먹는 방식은 어떨까. 사실 현재 대한민국은 이렇게 잘 먹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먹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이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단지 끼니를 때우는 것을 넘어서 더 맛있는 음식, 더 화려한 음식을 찾고, 심지어 ‘음식’이라는 코드가 방송과 인터넷을 점령하고 있을 만큼 온 국민이 먹는 것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잘' 먹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음식, 그리고 먹는 행위의 아름다움까지도 총체적으로 향유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영화 <트루맛 쇼>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흔히 ‘먹방’이라고 칭하는, 음식을 먹는 것을 보여주는 방송들은 ‘VJ특공대’와 같은 정보 프로그램의 맛집 소개 코너로 시작하여, ‘테이스티 로드’, ‘수요미식회’와 같이 특정 주제 하에 맛집을 탐방하고 논하는 단독 프로그램으로 점차 발전했고, ‘삼시세끼’처럼 오직 음식을 해서 먹는 과정에 충실하거나, ‘마스터셰프코리아’, ‘냉장고를 부탁해’와 같이 요리 대결과 서바이벌을 펼치며, 요리하는 방송, ‘쿡방’으로의 변용을 거듭했다. 또한 맛집과 요리가 대결의 도구로 사용되며,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든든하게 담보하는 자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특정한 서사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BJ가 음식을 먹는 장면만 보여주는 개인방송이 인기를 끌며, ‘먹방’으로만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방송후원금을 벌어들이는 인기 BJ들도 생겨났다. 이렇게 ‘맛’에만 집중하여 쾌락을 극대화하는 방송, 영화, 인터넷 콘텐츠들을 통틀어 ‘푸드 포르노’라고 하는데, 이것은 보는 이의 혀 끝 욕망을 자극하고, 맛집이나 음식을 찾아서 도시를 헤매게 하며, 궂은 날씨도 불사하고 긴 줄을 서는 진풍경까지 연출한다.      


  이렇게 보면 온 국민이 미식가인 것만 같지만, 이들 모두가 맛을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다큐멘터리 ‘트루맛쇼’에서 이것을 잘 다루고 있는데, 촬영을 위해 만든 레스토랑이 맛집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 ‘맛’이라는 것이 개인의 기준과 판단을 배제하고 미디어와 자본에 의해서 얼마든지 만들어지고 확대 재생산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아는 맛은 온전히 나의 오감으로 깨닫는 맛이라기 보다는, 미디어의 영향을 받아 머리로 아는 맛, 순수하게 주관적이지 않은 맛이 더 많다는 것이다. 물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음식이 맛있고 서비스가 괜찮은 집을 선택하기 위해 방송을 참고하거나 블로그 리뷰를 검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선택과 차후의 재선택에 있어 개인의 기준과 판단이 부재한, 몰개성과 몰취향은 걱정할만한 일이다.


영화 <토스트>의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음악이나 미술을 누리는 ‘좋은 취향’이 중요하듯이 음식에 대한 ‘좋은 취향’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다양한 취향 역시 중요하며, 개성 있는 판단 기준도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맛에 대한 취향은, 미디어에서 ‘좋은 취향’이라고 규정한 것을 주입식으로 교육시키고 일반 대중이 SNS를 통해 그것을 반복학습하며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무방비상태로 받아들이다 보면, 방송에 나온 맛집을 모두 찾아가서 먹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만 같고, 맛집 블로거가 리뷰한 식당이 맛이 없으면 아무래도 내 입맛이 문제인 것만 같다. 취업을 위해 공통된 스펙을 갖추고, 유행에 따라 외모를 가꾸는 것처럼, 음식 취향까지도 정해진 기준에 따라 갖추어야 하는 것일까.


  취향이라는 것은 다양한 교육적·자본적 요소의 결합으로 형성되며, 엘리트가 스스로와 대중을 사회적으로 구분하고자 할 때 계급의 지표로 사용된다.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가 그의 저서 『구별짓기』(1979)에서 이야기했던 특정한 사회 환경으로 인해서 형성되는 취향, 즉 '아비투스(habitus)'이다.

  음식 취향도 그러한 문화자본으로서, 언뜻 보면 음악이나 미술보다 더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능하며, 저렴하고 빠르게 충족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더 간편하게 경험을 갖추고, 일정 수준 이상의 취향을 형성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때문에 맛집에서의 ‘인증샷’을 SNS에 올리는 것은 일상적 표현을 넘어서, 본인이 ‘미디어에서 공인한’ 좋은 취향을 가졌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며 무의식적으로 만족을 획득하는 행위이자,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자본을 가졌다는 것을 확인 받는 사회적 인증을 내포하는 행위가 된다.      


  한편 맛에 대해 스스로 정립한 판단 기준을 가진 소수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맛집 탐방객들은 맛에 대한 판단이 과연 진정한 자신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맛집 탐방과 인증의 과정에서, 다음번 선택에 참고할만한 자신만의 취향을 쌓지 못한 채, 차후에 그 맛집을 반복해서 가거나 또 다른 방송에 나온 맛집을 찾는다. 또는 지나가다 들렀던 식당의 맛이 그저 그렇거나, 심지어 끔찍할 때에도 ‘맛집’이라는 태그를 달아 SNS에 업로드한다. 이것은 음식 취향의 발전이라기보다는, ‘맛집’에 대한 집착과 재경험의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욕망으로 선택한 것인지 모를 어느 맛집의 식탁에서 일시적 쾌락과 허기를 충족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반복될수록 영혼의 그릇은 비어 간다. 무엇에서 오는 허기인지 모르고 자꾸만 다음 그릇을 찾는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사회적 인간은 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인정과 소속이라는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진정한 자신의 욕망이 아닌 사회가 원하는 욕망을 추구한다. 방송에서 요구하는 맛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혀끝의 쾌락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사회로부터의 소속감이 결핍되고 개인의 영혼이 허기졌다는 사실의 반증일지도 모른다.

 

영화 <남극의 쉐프>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음식 영화로 유명한 ‘남극의 쉐프’에서, 남극 기지의 대원들은 외로움이라는 정신적 허기와 싸우며 매일의 식사에 집착한다. 그런가하면, 영화 ‘스키야키’에서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이 자신이 경험한 가장 쾌락적인 맛에 대해 돌아가며 이야기하면서, 이를 함께 상상하며 바깥 세상을 그리워 한다. 이들이 이토록 음식과 미각의 경험에 집착하는 것은, 맛이야말로 남극 기지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쾌락이자, 따뜻함을 누릴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처럼 혀끝의 쾌락에 유난히 집착하는 우리의 영혼은, 남극이나 교도소처럼 단절된 공간에 유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음식은 너무도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단지 쾌락과 욕망의 목적물로만 사용되기에는 아쉽다. 롤랑바르트가 비프스테이크와 감자튀김을 통해 프랑스의 문화를 읽어냈듯이 음식은 그것의 존재 자체를 넘어서는 문화적 상징이자 기호이다. 푸드라이터 나이젤 슬레이터의 유년기를 다룬 영화 ‘토스트’에서 계모의 화려한 요리보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던 단순한 토스트나, 소년 나이젤이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던 다 태운 대구 요리가 마음을 끄는 이유, 그리고 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별 것도 아닌 사소한 요리가 추억에 대한 오감을 일깨우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음식의 사회적·관계적 가치를 표상하는 것이다.  

 

영화 <스키야키>의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그리고 음식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과 역사 또한 담고 있다. 우에하라 요시히로의 책 『차별받은 식탁』(2012)에서는 지금은 어떤 지역을 대표하는 평범한 음식이 되었거나,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음식의 뒤에 자리한 역사를 추적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먹는 프라이드 치킨은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담은 흑인 노예들의 소울푸드였고, 일본의 오사카 지역에서 아직도 먹고 있는, 소 창자를 바싹 튀긴 '아부라카스'라는 음식은 오사카 도축장 근로자들의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음식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음식으로 어떤 지역의 역사를 고스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각 지역 전통음식의 특색이 모두 다르며, 나와 이웃이 즐겨 먹는 음식이 전혀 다르다. 그것은 와인이 기후나 토양의 특성인 ‘떼루아’를 온전히 품고 있는 것처럼, 음식 역시 한 입에 지역의 환경과 역사, 개인의 추억을 모두 뒤범벅해서 담아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품은 것이 음식이기에, 고유한 기질을 품지 못하고 점점 획일화 되어가는 음식 취향이 유난히 아쉽다.      


  물론 쾌락은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감각에 충실한 것이 무조건 천박한 것도 아니다. 쾌락을 즐기고 감각에 충실한 경험을 하는 것이 삶의 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아타락시아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한 쾌락에는 정신적 영속이 필요하다. 인생의 주요한 즐거움인 음식에서 찰나의 쾌락을 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만족을 얻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영속적인 만족을 얻기 위한, 더 나은 미식이 필요하다. 음식이 담은 의미들은 삶의 본질과 다름아니기에, 자본이나 욕망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야 한다. 말초적 쾌락에 대한 경박한 만족의 재경험이나 집착이 아니라, 음식에서 얻는 쾌락의 전후 사정을 모두 소중히 여기고, ‘맛’을 넘어서 음식의 다양한 사회·문화적 기능을 두루 향유하며 먹는 행위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미식을 누린다면, 인증샷으로 인정과 소속감을 갈구하거나, 방송에 나온 맛집에 줄을 서는 것으로 결핍을 충족할 필요는 어느새 사라질 것이다.


영화 <트루맛쇼>의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그러한 목적에서, 유기농 식품을 넘어 지역과 문화 특성에 맞는 다양한 음식 문화를 존중하는 ‘슬로우 푸드’나 식품의 장거리 운송을 지양하는 ‘로컬 푸드’ 등이 우리나라에서도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지구와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의 문화이자 책임이다. 그 자리에 타자의 욕망을 대입시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진정한 자신이 진실로 욕망하는 것을 찾아서 취향과 기준을 키움으로써, 식탁 앞에서 내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뱃속 허기를 채우고 소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정신적 허기도 만족스럽게 채우고 말끔하게 소화되도록 먹을 수 있었으면 한다.         





      

< 참고 문헌 >

롤랑 바르트, 『현대의 신화』, 동문선, 1997

우에하라 요시히로, 『차별받은 식탁』, 어크로스, 2012

자크 라캉,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1994

줄리언 바지니, 『철학이 있는 식탁』, 이마, 2015    



** 본 글은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11월호에 기고했던 글로서, 일부를 수정 및 생략하였음을 밝힙니다. 지면에 실렸던 글을 보시려면 www.ilemonde.com 을 방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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