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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y May 12. 2016

삶을 '삶'이게 하는 작은 모험, '비박'

현대의 도시인이 삶을 재생하는 방법


  '여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혹은, '여가'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어떤 풍경들을 떠올릴까.

  각자 다양한 풍경이 떠오를 것이다. 어떤 이는 조용히 책을 읽으며 차 마시는 시간을, 어떤 이는 영화관에서 신작 영화를 관람하거나 공연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을, 또 어떤 사람들은 도시 바깥으로 나가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한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꿀같은 주말의 낮잠을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여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다양한 풍경을 떠올리는 만큼, 여가는 우리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당연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실 '여가생활'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제대로 즐기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제주 사려니 숲길 (C) 2014. Kim Jiyeon. all rights reserved. 

  19세기 말의 산업화와 노동시간의 단축이 이루어지며, 소수의 상류층만이 즐기던 자연에서의 여가 문화는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노동자들이 즐길만한 문화시설이 충분치 않던 당시의 여가란 야외에서의 뱃놀이나 식사 등의 행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가 문화가 점차 발전하며, 현대에는 도시 안에서 대부분의 여가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서울만 보더라도, 영화관이나 공연장, 가벼운 운동이 가능한 스포츠 시설들이 즐비하고, 실내에서 암벽 등반과 썰매 같은 다이내믹한 스포츠를 즐길 수도 있으며, 한강에서 수상스키를 타거나, 서울숲에서 사슴을 만나는 등 더 자연과 가까운 체험도 가능하다. 주중에는 도시 안에서 노동을 하고, 주말에도 도시 안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이다. 물론 더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도 많지만, 교통체증과 높은 비용을 생각한다면 도시에서 즐기는 편리한 여가 생활도 꽤 멋진 선택이다.


지리산 둘레길 (C) 2013. Kim Jiyeon. all rights reserved.

   그런데, 이토록 편리하고 즐거운 도시를 벗어나 자연으로, 더욱 깊은 자연으로 떠나서 여가를 보내고, 심지어 주말이 아닌데도 애써 여가를 마련해서 떠나는 이들이 있다. 현재의 3040세대, 그러니까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 중반 정도에 태어난 이들은 이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자랐고, 개성 있는 즐거움을 추구할 줄 아는 세대이다. 때문에 전에 없이 자신의 관심사를 위해 거침없이 소비하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이 사회적 경력을 쌓고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자신의 관심사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취미생활로 실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으로 누리지 않는 특별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향과 도심에서의 복잡한 생활을 벗어나 한적한 자연을 즐기고픈 욕구가 더해져 캠핑, 비박 등 자연에서의 모험이 시작되었다. 


  사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상, ‘야외활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등산이다.  심지어 뉴욕타임스에서 한국인의 등산열풍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을 정도로, 등산은 전국민적 스포츠이다. 그런데 최근 3040세대가 즐기는 야외 활동은 등산과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느낌이다. 이들은 자연 속에서 간소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오곤 하는데, 온 힘을 다해 정상을 ‘정복’하는 등산과 달리 자연과 하나가 되는 의미가 더욱 강하며, 등산보다 좀 더 다채로운 요소를 담고 있다. 


  이런 야외 활동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오토캠핑이다. 오토캠핑은 자동차에 텐트와 취사도구 등 필요한 장비를 싣고 떠나서 야영하는 것으로, 보통은 취사가 허가된 캠핑장에서 야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오토캠핑이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 국소적으로 유행하다가 몇 년 사이에 점차 가족단위의 캠핑객이 늘어났다. 때문에 휴가철이면 국립자연휴양림과 같은 인기 캠핑장은 예약하기가 대학생들의 수강신청만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암표까지 나돈다는 이야기가 있올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제주 사려니 숲길 (C) 2014. Kim Jiyeon. all rights reserved.


  이렇게 캠핑장이 복잡해지자,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은 더 조용한 자연으로 떠나는 비박을 시작하였다. '비박'이란, 군대가 야영할 시 경비병이 밤새 지키는 것에서 유래한 독일어로, 'bi(주변)‘와 ’wache(감시하다)'가 더해져 ‘biwak’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같은 뜻의 프랑스어인 ‘bivouac’이나, 백패킹(backpacking)이 더 자주 쓰인다. 


  비박은 원래 비상시에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노영하는 것이지만, 여행이나 취미로서의 비박은 작고 간소한 1~2인용 텐트를 사용하며, 시설이 갖춰진 캠핑장이 아닌 야생의 자연에서 혼자, 또는 작은 무리를 지어 하룻밤을 보내는 야영(camping)에 가깝다. 오토캠핑보다 날 것의 자연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수천명의 회원을 보유한 국내 최대 비박 커뮤니티 ‘백패킹코리아’의 한 회원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그는 '백패킹코리아'의 회원들 면면을 보면, 주로 30~40대 남성이 비박을 즐기며, 남성은 30대 중반, 여성은 30대 초반 무렵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한 입문자의 연령으로 보건대, 도시에서의 스트레스와 일상의 권태를 체감하기 시작하는 즈음에 일탈로서 비박에 입문하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견해를 전하였다. 


강원도 선자령 (C) 2015. Kim Jiyeon. all rights reserved.

 

  다양한 캠핑요리는커녕 미리 준비한 간편식으로 식사를 때우고, 전기나 수도는 물론, 불을 피울 수도 없고, 화장실도 없는 야생에서 잠을 자길 자처하는 비박인들. 이쯤만 되어도 보통 사람들은 의아해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자연이 더 험준할수록 비박의 매력이 증가한다고 입을 모은다. 비박 마니아들은 퇴근 후 산에서 자고 바로 출근하는 일명 ‘퇴근박’으로 일상의 비박을 즐기며, 평범하고 소소한 비박을 넘어 점점 극한의 경험을 추구하기도 한다. 


영화 '와일드'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비박을 할 때는 일반적으로 초보자가 약 30kg의 장비를 가져간다고 한다. 그런데 숙련자들은 최소한의 생존도구만 갖춘 8~10kg의 장비로 생활한다던지, 일부러 눈 속에서 비박할 수 있는 곳을 찾거나, 텐트 없이 침낭만을 갖고 바위 아래에서 잠을 청하며 건조식품 등 비상식량만으로 버티기도 한다. 심지어 가끔은 오로지 맨 몸으로 산에 가서 임산물을 채취해 먹으며 하룻밤을 버텨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사실 이쯤 되면 즐거운 여가 생활이라기 보다는, 거의 베어 그릴스(미국 디스커버리 채널의 생존 다큐멘터리, ‘인간과 자연의 대결 (Man vs. Wild)’의 주인공)에 가깝다. 


  이런 비박 마니아들의 로망은 굴업도, 간월재, 선자령과 같이 아직 야생의 자연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 명소에서 비박하거나, 약 800km에 이르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 서부를 종단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acific Crest Trail, 이하 PCT)과 같은 해외 장거리 백패킹에 도전하는 것이다. 


  한편 비박에도 문제는 있다. 야간산행이나 임산물채취, 산에서의 취사는 법으로 규제하고 있으며, 국립공원의 경우 허가받은 장소 외에는 야영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안전과 사유재산 보호 때문이기도 하고, 환경보호가 이유이기도 하다. 

제주 사려니 숲길 (C) 2014. Kim Jiyeon. all rights reserved.

  이 때문에 비박인들 사이에서는 ‘Leave No Trace(LNT)’, 즉 장비를 간소화하고 취사활동을 배제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최대한 자연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친환경 비박을 지향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또한 여전히 불법 야간산행을 자행하는 동호회들이 있지만, 내부적으로 불법적인 행위는 자제하자는 자성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렇게 도시를 벗어나 자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따라가는 작은 모험을, 모험가 앨러스테어 험프리스는 ‘마이크로 어드벤처’라고 칭했다. 이는 극지를 탐험하는 ‘매크로 어드벤처’에 비해 시간이나 돈이 비교적 적게 들며 성취의 정도에 차이는 있으나, 자연을 경험하고 새로운 변화와 재미를 추구하는 맥락은 같다. 이것이 비박이라는 작은 모험에서 얻을 수 있는 첫 번째 장점이자,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도대체 그것 외에 무엇을 더 얻을 수 있기에,
그렇게도 고생을 자처하며 한 데서 잠을 자는 것일까? 


  험프리스에 따르면, 현대의 삶은 끊임없이 불모화되며, 우리는 스스로 어둠을 택하기 전까지는 너무 밝은 빛 속에서 지낸다고 한다. 비박을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자연, 즉 인공의 빛이 없는 어둠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생존에 꼭 필요한 것만 갖춘 단순한 삶으로 회귀하여 하루의 잠자리와 먹을 것, 안전을 도모하는 행위 하나하나에 집중함으로써,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던 소중함들을 다시금 경험하고, 안온한 일상의 의미를 되짚는다. 

  

영화 '와일드'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한편 비박은 주로 혼자 떠나며, 여럿이 떠날 때에도 함께 저녁식사를 한 후에는 각자의 텐트에 머물며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연 안에서 홀로 앉아 있는 고독, 어느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을 자유, 이것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 속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자연 속에서의 하룻밤을 통해, 침묵과 고독을 스스로 구하며 내 안의 자아와 마주 앉아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이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다시 발견한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멀리 떨어져 다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관계들을 재설정할 수도 있다.


 “진정한 삶의 길을 찾으려면 두 번의 여행을 해야 한다. 첫 번째 여행은 나 자신을 잃는 것이고, 두 번째 여행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다.”라고 했던, 한 작가의 말을 빌자면, 비박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 자신을 잃고, 다시 한 번 나를 발견함으로써 삶의 길을 찾는 여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때문에 비박에서 얻는 자연에서의 경험은,
도시생활에 다시 적응하고 제자리를 찾기 위한 모험으로서
역설적인 의미를 지닌다. 

  현대의 도시에서의 삶은 고달프다. 육체적 피로 외에도 개인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과 어려움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기에 도시인들은 늘 마음이 고프다. 그런데 개인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우는 도시의 삶과 달리, 험준한 산과 변화무쌍한 날씨, 고요한 밤의 어둠 속에서 경험하는 거대한 자연의 숭고미는 아주 작은 개인의 존재와 그 한계를 인식시켜준다. 그리고, 네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며 어깨를 두드리고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이것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알랭 드 보통은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일화를 전한다. 워즈워스는 자연 속에 살면서 경쟁이나 질투, 불안에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며, 자연 속에서의 경험은 ‘재생의 힘’이 있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때는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고 하였다. 보통은 이에 보태어, 떠들썩한 도시에서 마음이 헛헛해지고 수심에 잠길 때 자연을 여행하며 만난 이미지들에 의지하며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삶의 위안은 분명, 자연에서의 하룻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일 것이다. 


영화 '와일드'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따뜻한 위안을 넘어 자연에서 삶의 구원을 얻은 이야기도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와일드>에서 주인공 셰릴은, 앞서 언급한 비박마니아들의 로망이자, 완주에 성공하는 이가 드물다는 극한의 도보코스 PCT를 걷는다. 그녀는 30kg의 짐 뿐만이 아니라, 가정폭력과 마약으로 얼룩진 자신의 과거, 어머니의 죽음과 이혼의 아픔까지 어깨에 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꼬박 94일을 걸어, 마침내 4285km를 완주해낸다. 처음에는 자신의 가방조차 어깨에 짊어지기 어려웠던 그녀가 어떤 위기에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이 길을 다 걷지 못하면 아마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자연에서의 생활이란, 단순한 위안을 넘어, 삶의 재생을 구하는 순례였을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 도서 <와일드>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난다.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인생처럼 나의 삶도 신비로우면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있는 바로 그것. 인생이란 얼마나 예측 불허의 것인가. 그러니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셰릴이 싱긋 웃었던 것도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삶은 내버려두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아보고 다시 정립해야 한다. 그래서 나의 자아와 돈독한 관계를 맺고, 제자리를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다. 영화 <버터플라이>에서, 나비수집가 노인 줄리앙과 윗집 꼬마 엘자는 환상의 나비 ‘이자벨’을 찾으러 떠난다. 그들은 남프랑스의 산악지대에서 천진한 대화를 나누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지만 결국 환상의 나비는 발견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비 ‘이자벨’은 다른 먼 곳이 아니라 줄리앙의 집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엘자는,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엄마 ‘이자벨’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멀리서 찾아 헤맨 ‘이자벨’은 사실 바로 옆에 있었던 것이다. 일상을 벗어나 거대한 자연의 품에 몸을 맡김으로써 소중한 것을 다시 보듬고 제자리를 찾는 것, 아마 떠나지 않았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진실이다. 


  물론 떠나지 않고 휴식과 위안을 구하기 어려운 우리의 삶이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모험은 문 밖에 있다.’ 꼭 히말라야나 남극에 가지 않아도 어떠한 형태로든 자연과 모험은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러한 모험이야말로 불모화된 도시의 삶을 재생하고, 다독이며 위로하여, 마침내 삶을 ‘삶’이게 할 수 있는 힘일 것이다.  







** 참고문헌   

김용섭, <라이프 트렌드 2014>, 부키, 2013

셰릴 스트레이드, <와일드>, 나무의철학, 2012

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 <핑>, 웅진윙스, 2006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이레, 2004

앨러스테어 험프리스, <모험은 문밖에 있다>, 윌북, 2015     



** 본 글은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12월호에 기고했던 글로서, 일부를 수정 및 생략하였음을 밝힙니다. 지면에 실렸던 글을 보시려면 www.ilemonde.com 을 방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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