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은 잘하면서 '힘들어', '도와줘', '구해줘'라는 말은 하지 못한다. 타인을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구체적 내용은 몰라도 각자의 삶에 각자의 전쟁터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좋아하는 사람들의 어깨에 무언가 짐을 더 얹어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함께 일할 때 타인에게 의지하고 기대도 된다는 것을, 나만 믿고 다 책임지려고 하는 건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오만이라는 것을 배웠지만, 여전히 온전히 내 몫인 일이나 감정에 대해서는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 그래서 진짜 힘들 때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혼자 있는 편을 택한다.
물론 말하지 않고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것의 위험을 안다. 정말 위험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는 그만큼 숨기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은 어색하다. 반면 혼자 끌어안는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타인에게는 꼭 도와달라고, 안아달라고 말하라고 당부한다. 무슨 아이러니인지.
언젠가는 말도 없이 체코로 떠났고, 언젠가는 제주에서 한참을 지냈다. 마음이 아물 때까지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훌쩍 여행 떠나기가 어려운 요즘은, 가끔 마음이 혼자 밤을 헤맨다. 지난밤에는 끝도 없이 불안한 악몽을 꿨다. 꿈에서조차 선잠을 자는 바람에 현실에서는 당연히 선잠을 잤고 3시간도 채 자지 못했다.
이 얘기를 들은 친구는 그날 밤, 잘 자라는 인사를 건네며 또 악몽을 꾸면 꿈에서라도 자기를 부르라고 했다.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꿈에서조차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구해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구나. 불쑥 건네 온, 부르면 나타나서 구해 주겠다는 그 말이 새삼 든든했다.
며칠 전 정빈 작가님을 만나서 마음의 집과 창문 이야기를 했다. 나는 늘 내 마음을 집에 비유한다. 넓은 마당이 있는 작고 단단한 벽돌집. 마당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다. 누구든 들어와서 마음껏 놀다 가라고, 울타리 안에 들어온 모두에게 나는 친절을 베풀겠다고.
조금 놀다 떠나는 사람도 있고, 계속 머무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마당의 꽃과 풀을 뽑아 버리거나 심하면 잔디에 불을 질러 다 태워 버리기도 한다. 분명 아픈 일이긴 하지만, 나는 늘 괜찮다고 했다. 마당 안쪽 벽돌집의 문은 쉽게 열어주지 않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잔디야 다시 심으면 되는 거고. 나는 마당에 오래 머물며, 거기 있는 꽃과 나무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벽돌집의 문을 열어 줄 뿐이다.
지나가는 사람은 내 집을 해치지 못하기 때문에 딱히 대미지 입을 일도 없다. 그러니까 나는 누구에게든 쉬운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누구에게도 쉬운 사람이 아니고, 한껏 열려 있고 용감하지만 이면에선 누구보다 조심스럽다. 그런 인간이라는 것을 나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다.
어떤 날에 문득 알았다. 벽돌집을 너무 튼튼하게 세웠음을. 튼튼하게 세우면 다인 줄 알았지만, 바람이 세게 불면 벽돌집도 저항하지 못하고 무너지는 날이 있었다. 그래서 튼튼한 집이라도 창이 여러 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단단한 지붕 아래 나 혼자 꽁꽁 싸매고 있는 것보다 맞바람 치도록 창을 열어 두고 거센 바람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어쩐지 나를 닮은 정빈 작가님께 했던 얘기는 그런 거였다. 그러니까 집을 너무 단단히 세워두기만 하지 말라고, 창을 많이 내야 갑작스러운 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그런데 정작 나는 엊그제 친구의 말을 듣고 알았다. 내 벽돌집이 튼튼한 건, 마당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대미지를 입지 않는단 뜻도 있지만, 그 안전한 공간 안에서 계속 혼자 머물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나는 단단하다는 말은, 사실 마당의 넓이만큼만 용감하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그 단단한 집 안에서 창 너머로 마당을 바라보기만 했다. '같이'라는 말을 작년 내내 배웠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바람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집에 창을 냈는데, 그 창을 더 활짝 열어 두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어떤 날은 혼자 있고 싶지 않으니 집 안에 들어와 달라고 문을 활짝 열고, 나쁜 꿈을 꾼 날은 어서 들어와 등을 쓸어 달라고 어깨를 다독여달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